장애인과 사는 비장애인의 회고
연말이 되면 슬슬 머리를 치켜드는 고민이 있습니다.
매년 찾아오더니 올해도 역시, '나 잘 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어요.
글쎄요, 이 심오한 질문에 답하려면..
궤도 님처럼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뭔지부터 정의해야겠죠.ㅎㅎ
저는 장애인 동생과 살아가면서 '잘 산다'의 정의가 점차 가벼워진 것 같아요.
[잘 산다 = 내 몫을 잘 해내며 산다, 경제적으로 풍족하다, 주변에 안 좋은 일이 없고 평안하다, 수치적으로 대한민국 평균이다, 남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어도 나는 만족한다] 등 너무나 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잘 산다'는 '주변에 안 좋은 일이 없고 평안하다'에 가까워요.
주변이라 함은 일차적으로 우리 엄마, 아빠, 동생, 오빠고, 그들이 건강한 것이 제겐 가장 중요해요.
제 기준에서는 동생이 올해 병원에 입원을 안 했다면 그것도 잘 산 것이고요.
엄마나 아빠가 허리디스크, 목 통증 등으로 고생했어도 어쨌든 병원에 갈 정도가 아니라 금방 회복했다면 잘 산 거예요. 오빠가 아프지 않고 건강했고, 공연할 때 다치지 않고 잘 마무리했다면 그것도 잘 산 거고요.
저도 큰 병치레 없이 제 할 일을 묵묵히 했다면, 잘 산 거죠.
저에게 있어 '잘 산다'의 정의는 건강이 가장 중요한 척도인 것 같네요. 저도 이걸 쓰면서 깨달았어요!
아무래도 동생을 잃을 뻔한 경험이 있다 보니, 어쨌든 저쨌든 건강하면 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나 봐요.
<'잘 살았는지'를 따지는 구체적 척도 예시>
잘 살았다, 연초 목표했던 일을 다 했는가?
잘 살았다, 필요한 자격증을 땄는가?
잘 살았다, 원하는 곳에 취직이 되었는가?
잘 살았다,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를 얻었는가?
잘 살았다, 대출을 다 갚았는가?
대부분 위에 적힌 기준들을 떠올리실 것 같아요. 왠지 정확히 수치화되고 계산될 수 있는 척도를 생각해야만 할 것 같죠. 그리고 '반드시 그걸 해내야 했는데, 왜 나는 못할까' 하며 자책할 때도 많고요. 이 좋은 연말에 왜 그래야 하냐고요! 물론 저도 며칠 전까지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한 저를 원망했습니다만..ㅎ
동생을 보며 다시 생각했어요.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하루구나.
"나 살아 있으니까 그걸로 됐어."가 아니라, "숨 쉬는 한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힘을 얻어요.
'잘 산다'의 기준을 낮추면 마음이 많이 편해져요. 대신 조금 더 자주 점검하면 좋아요.
그러니까 매일, 오늘 잘 살았나 보고- 그걸 합계 내어 올해의 잘 산 정도를 체크하는 거죠.
[오늘 동생이 밥 잘 먹고 잘 자고 잘 쌌다] - [그럼 오늘 잘 살았네.]
[누가 아파서 쓰러졌대, 장례식 갈 일이 생겼어]- [네 마음은 괜찮아? 잘 보내주고 왔어? 그럼 잘 살았어.]
[두루뭉술하게 계산해 보니, 올해 중 200일은 잘 산 거 같아.] - [어 그럼 잘 살았네.]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며 2023년을 보내줄 수 있잖아? 너 잘 살았어."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올해도 정말 잘 살아오셨습니다.
인생이란 예측이 되지 않고 어려운 일도 너무나 많습니다.
좀 잘해보려고 하면 하나씩 엎어지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마음 쓰게 되고.
남 탓을 하지 못해 또 내 탓으로 돌리다 지치고, 나중엔 억울해서 화가 나고.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사소한 이유가 있지 않나요?
저는 제 동생의 미소가 그 이유입니다.
솔직히 제 삶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습니다.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안 계신다면? 동생이 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면? 막막하죠.
그런데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 그 순간이 아깝습니다.
내 옆에서 동생은 아주 건강히 웃고 있고, 부모님도 아직 자기 삶을 더 멋지게 꾸리려고 노력하시는데요.
제가 뭐라고, 잘 사는 사람들의 걱정을 사서 합니까.
사람은 살면서 하루도 현재에 살지 못한다고 해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낭비한다고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현재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죠.
2023년 끝자락입니다. 여러분은 올해 중 며칠이나 현재를 즐기며 보내셨는지요.
저는 걱정이 들 때마다 "몰라. 나중에 닥치면 생각하자."라는 말로 넘겨버리곤 했는데요.
작년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나중에 생각하자.", "닥치면 그때 생각하자."
그러면서 두루뭉술, 어영부영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현재를 즐기는 것은 불안함을 없애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제가 동생의 미래를 걱정하느라고 몇 날며칠을 지새우다 찾은 방법이 바로 그거였어요.
변하는 게 없어 보일지라도, 내 마음 하나 편안해진다면 그것만큼 '잘 사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올해 진짜 잘 살아보자!' 보다는 '하루하루 잘 살자.'로 목표를 조금 작게 가져가면 어떨까요.
제가 우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를 잘 살아내면 된다."는 어머니의 말 덕분이었습니다.
다가올 2024년에 대한 걱정, 지나간 2023년에 대한 후회 대신, 2023년 12월 지금의 나를 사랑해 주세요.
저도 올 연말은 건강히 잘 지내온 가족,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동생에게 특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요.
다음 주에는 가족들의 연말정산 글로 찾아올게요!
날이 많이 추워졌는데 감기 조심하시고요. 읽어주신 분들께 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