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본 애니메이션을 성인이 된 후 다시 보면 주인공 캐릭터가 아니라 오히려 악역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전에는 마냥 주인공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악역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보면 오히려 안쓰러운 캐릭터로는 대표적으로 '둘리'의 '고길동'과 '톰과 제리'의 '톰'이 있다. '둘리보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해당 애니메이션을 잘 모르는 터라 이것을 직접 실감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난 영화 '세 얼간이'를 13년 만에 다시 보면서 나 역시 등장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세 얼간이 친구들. 왼쪽부터 라주, 란초, 파르한.
2009년, 인도에서 영화 '세 얼간이'가 개봉했다. 영화는 명문 공대 ICE를 배경으로 하여 획일적이고 경쟁이 심한 인도의 교육 현실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역시나 흥겨운 춤과 노래가 빠지지 않는 인도 영화의 특색을 그대로 살린 이 영화는 자국인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인도와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학생으로서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에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나 또한 처음으로 접한 이 인도 영화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평소 늘 생각하던 것을 주인공 란초가 대신 말해주고, 거기다 기존 교육 방식이 옳다고 여기는 세상과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오롯이 자기 신념대로 성공해서 그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기까지 하니 그렇게 공감이 되고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세 얼간이 공대생, '파르한'과 '라주'와 '란초'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 인물인 란초는 공학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열정적인 학생이면서도 학생들 간의 경쟁, 성적, 기계적인 암기 등을 중시하는 교수들의 권위에 번번이 도전해서 골칫덩이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한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인 셈이다. 한편 란초의 대척점에 선 학생으로서 이 영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차투르'도 있다. 차투르는 란초와 달리 공학이라는 학문에 진정한 애정은 없으며, 그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교수들에게 잘 보여서 훗날 출세하는 것이 목표인 학생이다. 순수한 호기심이나 열정 없이 그저 단순 암기를 반복하고, 상대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시험 전날 다른 학생들의 방에 야한 잡지를 집어넣어 공부를 방해하는 차투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얄밉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면 란초는 불합리한 시스템과 권위에 도전하는 발칙하고도 유쾌한 영웅적 면모를 보이고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상대방을 골탕 먹인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그 후로 몇 번 더 보면서도 나는 늘 란초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새삼 차투르가 눈에 들어왔고, 비록 주인공 란초의 빛에 가렸지만 그 역시 한편으로는 대단하고 또 안쓰러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 차투르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하루 8시간씩 주입식으로 암기를 한다. 심지어 의미를 이해하지도 않은 채 그냥 외우는, 그야말로 '단순 암기' 방식을 고수한다. 나는 일단 차투르가 하루에 8시간씩 공부한다는 것에서부터 놀랐다. 공부법이야 어떻든 간에 그렇게 장시간 집중해서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 정도면 성실함과 끈기, 노력 면에서는 영화 속 어떤 학생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는 단순 암기라면 암기의 난이도가 훨씬 더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 어려운 걸 해냈으니 정말 엄청난 집념의 사나이라 하겠다.
연설문 내용이 바뀐지도 모르고 열심히 연설하는 차투르
그러나 이렇게 의미를 모른 채 무작정 외우는 방식 탓에 차투르는 란초에게 된통 당하고 만다. 그는 학교 행사에서 학생들을 대표해 총장의 헌신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열심히 연설하지만 전교생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다. 란초가 연설 대본 속 몇몇 단어를 몰래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폭소하는 군중 앞에서 차투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자기 방귀에 대한 시까지 낭송하고,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차투르 입장에서 보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특히 란초가 바꿔서 써넣은 단어가 단순히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단어가 아니라 '강간', '변태', '젖'처럼 성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차투르는 더 심하게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또 차투르가 비록 얄밉게 굴긴 했어도 란초와 파르한, 라주에게 직접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은 사실 없다. 그런데도 그는단지 라주에게 단순 암기의 폐해를 깨우쳐주겠다는 란초의 목적 때문에 이용당했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조롱당했다. 이 사건은 그가 살아가는 내내 트라우마에 가까운 흑역사로 남았을 것이다. 란초는 삶의 방식과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투르의 노력을 짓밟고 평생 씻기 힘든 모욕을 준 셈이다.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본 지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주인공 란초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의 삶의 방식을 동경한다. 비록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지언정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에서 빛나야 마땅하고,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자기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무조건 공학자를 시키려는 인도나 공부 잘하면 일단 의대에 보내고 보는 한국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거나 더욱 심각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영화 '세 얼간이'가 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경쟁만 부추기는 교육 방식, 저마다 다양한 재능과 관심을 지닌 학생을 획일화된 진로로 구겨 넣는 세태는 분명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현 시스템을 비판하고 바꾸고자 하는 과정에서 차투르처럼 기존 체제에 순응해 자기 방식과 신념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삼아 매도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경쟁과 획일화를 지양하고 순수한 열정과 교육 체계 및 진로의 다각화를 추구하려는 이유도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존중하고 빛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특정 가치, 이념, 방식이 아무리 타당하다고 한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 있다. 설령 상대방의 방식이 진짜로 틀렸다고 해도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선택이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되, 내 시각에서 남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사고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나도 존중하고 남도 존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