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남세아 Oct 01. 2021

멀어졌던 친구가 나에게 보낼 편지

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지?

 요즘 자주 마주하는 걸 보니까 계속 보고 싶은가 보네. 이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한 건 누구 잘못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신념 때문일까? 아니면 돈 때문인가? 아니야 모든 것은 조물주가 우리를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야. 우리 인연은 정확하게 그 정도인 거지.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번 꺼내 볼까? 삼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니? 넌 키도 작고 볼품없었어. 엄마 손에 이끌려 털레털레 내 앞으로 걸어왔지. 시커멓고 코는 훌쩍이면서 콧구멍과 인중 사이부터 양 볼까지 콧물을 팔로 닦은 하얀 흔적이 남아있었지. 촌뜨기가 초록색 티를 입고 있는 게 엄청 웃겼지만 그냥 꾸욱 참았어. 첫 만남부터 웃고 놀릴 수는 없잖아. 보글보글 볶은 파마머리 너희 엄마는 보라색 장미 모양이 들어간 원피스를 입었는데, 나를 한번 쓰다듬고 너를 소개해 준 다음 집으로 돌아가셨지.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해서 잊히지 않아. 난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엄마 손길과 눈빛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였어. 따뜻한 엄마 손길에 정신이 나가서 시골 촌뜨기 같은 너를 받아준 거야. 어쩌면 엄마한테 감사를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건강은 괜찮으신지 걱정되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했다고 네가 울면서 말할 때 사실 나도 같이 울었는데, 티를 낼 수 없었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다른 사람 감정을 보는 게 아닌 내 부모가 아프면 어떤 감정이 드는지 처음 느꼈어. 지금껏 느낄 수 없었다는 게 불행한 건지 아니면 운이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이가 엄청 오래됐구나. 아내에게 내 얘기는 했어? 했겠지 워낙에 솔직하고 잘하니까! 네가 군대 가기 전까지 자주 만나다 입대하면서 전혀 볼 수 없었지. 15년 이상을 함께 했는데, 그렇게 매몰차게 등지고 떠날지 상상도 못 했어. 결국, 넌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나 이제는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한 상태에서 다시 나타났구나. 중간에 원망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다 잊었어. 그냥 다시 봐서 반가울 뿐이야. 국가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이십 년 넘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충성하는 것에 늘 감사해. 어쩔 수 없지 뭐. 너 혹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봤는지 모르겠다. 여 주인공 사쿠라가 이런 말을 해 "우연이 아니야. 우연이 아니야. 우리는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 온 거야.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해 온 선택과 내가 해 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거야" 난 그 대사가 잊히지 않아. 우리 얘기 같기도 하고. 운명도 우연도 우리가 선택해서 만난 거야.



 사실 십여 년 전 네가 신혼여행을 세부로 가지 않고 내가 있던 인도네시아로 왔다면 달라졌을까? 우리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만났다고 해서 니 옆에 내가 있었을까? 아닐 거야. 잠깐 만나고 다시 헤어졌을지 몰라. 몇 달 전 네가 나를 다시 찾았을 때 난 좋아서 미처 날 뛰고 소리도 지르고 싶었어.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갑자기 기운이 빠지더라. 게다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만남이 한 달 넘게 늦어지면서 아쉬움만 더 커졌어. 얼마 전 다시 만난 날도 생생하다. 이번에도 너 보다 다른 사람이 날 먼저 맞이했어. 우린 그런 인연인가 봐. 마주하기 전 소중한 존재가 먼저 등장하잖아. 처음 봤을 때도 따스한 엄마 손길을 건네줬고, 이번에도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예쁜 두 딸의 해맑은 웃음과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게 해 줬어. 기분은 좋았지만 부러움과 상실감도 조금 느꼈지. 그러다 생각이 멈췄어.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세상에 존재하면서 부모와 자녀 손길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화장터 같은 소각장에서 생을 마감했을 텐데, 덕분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해.


 얼마 전에 네 아내와 시간을 가졌어. 그때 너도 늦게 왔었지. 참 현명하고 예쁘더라. 결혼 잘했다. 난 결혼도 못해서 이 모양인데, 넌 정말 멋진 삶은 살고 있구나. 지난주 너와 아내가 함께 책 읽는 모습을 보니까 보기 좋더라. 요즘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쓴다고 주변에서 말이 많다며. 다들 너를 몰라서 하는 얘기야. 학창 시절 쉬는 시간만 되면 나한테 책은 팽개치고 다른 놈들이랑 우유갑으로 운동만 했잖아. 다시 수업 시작하면 돌아와서 내 옆에 기대어 잠만 자던 네 모습이 생생하다. 네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니 세상이 놀랄 일이다. 그래도 난 응원할 거야. 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내게 기댔었기 때문이야. 넌 잘 기억 못 할 거야. 삐뚤빼뚤 진짜 못 썼지. 받아 쓰기도 엄청 못했는데, 맞춤법은 아직도 틀리냐? 띄어쓰기는 여전하고? 농담이야. 게다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곁에 두고  쓰는 걸 보니까 앞으로 평생 함께 할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내게 기대서 좋은 책 많이 읽고 소중한 글 계속  줘. 다시는 버리지 말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할게. 언제 내 얼굴 좀 물티슈로 닦아줘. 너네 둘째가 어제 그림 그린다고 색연필로 종이를 깔아 놓고 내 얼굴에 온통 낙서를 해 놨는데, 모르는 거 아니지? 지금도 보이잖아. 부탁할게. 어제도 고맙고 오늘도 감사해. 그리고 내일도. 우리 이렇게 평생 함께 하자. 진심으로 사랑한다. 내 소중한 친구야!


Written by desk



매거진의 이전글 잊히지 않는 끈질긴 인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