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생책을 만나지 못했다. 인생책이라고 하면 삶의 방향을 정해 줬다거나 큰 감동을 받았거나 다른 상황과 의미 있게 연계되어 있는 책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가치관을 정립해 준 책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책상 한편에 쌓여있는 책들 중에 내용이 기억나는 책도 거의 없다. 꼼꼼하게 읽어 보려고 요약도 하고 서평도 썼는데, 서평 노트에 있는 내용 자체가 무척 새롭다.
지금껏 읽었던 책들이 내 머릿속에서 잘 융화되어 나의 가치관을 성립하고 지식을 바탕으로 필요한 순간에 지혜의 빛이 되어 잘 살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책을 본다. 독서 예찬론자들께서는 '무식'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우선, 책을 읽는 습관이 적절하지 않다. 아침에 가볍게 한두 단락을 읽는다. 시간이 나면 여러 권 책을 20~30페이지 정도씩 읽던지 한 권을 100페이지 정도 읽는 것 같다. 대중없다. 보다가 졸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려운 단어나 내용이 있으면 검색도 한다. 다 읽은 책은 쌓아놓다가 날을 잡아 중고서점에 판다.
그러면서도 팔거나 버리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작년에 읽은 '생각의 탄생'이다.
책을 느리게 읽다 보니 한 달 정도 걸려서 읽었던 것 같다.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정리는 잘 안되고, 두꺼운 책을 읽어보겠다고 시작했는데, 어려운 내용이지만 쉽게 읽었다. 열심히 노트에 요약하고 고민도 하면서 이해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훑어보니 역시 새롭다. 창조성을 빛낸 13가지 생각도구 중에 놀이와 추상화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어렸을 때 아이큐가 높았다는 말은 스스로 과거를 조작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내에게 이틀 전 인생 책이 뭐냐고 물어봤다. '해리포터'란다. 너무 부러웠다. 인생 책을 바로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전 세계 남녀노소 불문하고 매니아적인 성향까지 녹아들어 있는 유명한 책을 좋아하시다니, 역시 멋지시다.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긴다. 동화책도 기억에 없다. 난 인생 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점점 느려지는 이해력, 이상한 것만 외우는 조작 기억법, 변화무쌍 소신 없는 가치관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에는 누군가가 물어보면 '무소유'라고 대답하곤 했다. 20대 중반 즈음 홍천에서 좋아하는 후배가 법정스님께서 직접 좋은 글을 써주시고 선물해 주셨다면서 건네줬고,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해는 이해의 이전 단계이다'란 문구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책 어딘가에 있었다.
이 문장을 바탕으로 이해 못하는 상황들을 하나씩 줄이다 보니 지금껏 잘 살고 있다. 여전히 다른 내용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머릿속에 남는 한 문장이나 읽었을 때 오는 느낌 정도가 인생책을 선정하는 기준인 것 같다.
앞으로 누군가 다시 물어본다면
"제가 좀 모자라서 인생 책은 못 만났고요. 요즘 폴리매스를 2주 동안 천천히 읽고 있어요"라고 대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