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희망하지 않은 나의 희망직업
한국에서 '역할'로만 살아온, 행복한 듯 행복하지 않은 선생님
그가 살아온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우리나라 사회, 특히 교육의 '과거-현재-미래'와 MZ세대의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내 '희망직업'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인사치레로 물어오던 어른들의 질문에서 조차 '선생님'은 내 입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항상 어려운 존재였다. 어렸을 때는 선생님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대개 무서웠고, 그나마 덜 무섭다면 권위적이었다. 머리가 좀 더 커서는 지겹거나, 때로는 엽기적인 경우도 있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은 디자이너였다. 몇몇의 어린이 그리기 대회에 입상한 후부터였다. 온전한 내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술을 전공했던 고모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의 터치(?)가 내 그림을 뛰어나게 보이게 했으리라. 중학교 때부터는 조금 솔직해지고 많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는데, 희망직업에 쓰인 직업은 대개 둘 중에 한 가지였다. 변호사 아니면 법조인.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의 희망직업도 나의 진로지도 칸 옆에 쓰도록 되어있었는데 그때 적혀있던 한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본인 희망과 같이 법조인을 희망함.'
본인 희망과 같이 법조인을 희망함.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순진했다. 유치원생이 마블 영화를 보고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이 되고 싶다고 하듯 나에게 법조인이 그랬다. 법으로 매일 뉴스에 나오던 악당들을 혼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때는 법조인의 푸른 꿈을 안고 고등법원에 견학도 가고, 법무부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모의재판에도 출현해 KBS 방송도 탔다. (당시 나는 판사 3이었는데 아마 우배석 판사였을 것이다. 열심히 큰 법전을 넘겨보는 역할이었고, 대사는 없었다. 판사 1이었던 부장판사 친구는 무얼 하는지 궁금해진다. 참고로 대사가 가장 많은 검사 역할을 하던 친구는 지금 고등법원 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수능을 봤다. 결과는 처참했다. 내가 희망하던 법대의 법자도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엄마는 '한 번 더!'를 외쳤지만 그 순간 나는 남몰래 훔치던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
아버지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나는 재수생활을 마칠 때쯤 깨달았다.
그건 부모로서 흘리는 안타까움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고통의 눈물이었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르는 철없는 스무 살짜리에게 주어진 1년간의 수험생활은 그야말로 고문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고문은 '역 연좌제'처럼 부모님과 가족에게도 전가되었는데, 집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재수학원을 매일같이 통원하느라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던 어머니, 그리고 잠에 취해 사경 헤매듯 헤매는 나를 깨워 학원까지 실어 나르신 아버지, 한창 게임도 하고 시끄러워야 할 동생은 수험생 형 때문에 매일 쥐 죽은 듯 사는 게 의무였다. 무엇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새벽 2시까지 공부만 해야 했던 나에게 1년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 당시 기도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도 마무리할 수 도 없는 날들이 많았다.
아버지도 대입을 위해 재수를 했다. 나와 다르게 아버지는 이과였는데, 그때의 아버지는 어떤 푸른 꿈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나처럼 꿈보다는 뜬 구름이 아니었을까? 지옥 같았던 재수 생활 끝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그 대학교라는 곳에서 눈을 떠보니 '교대'였다. 내 플랜 A부터 Z까지 찾아볼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플랜 G 쯤에는 있었나 보다. 엄마는 내가 목표로 했던 법대에 가기엔 조금 아쉬운 수능 성적표를 받아온 날부터 매일 나에게 교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된 '행복한 엄친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야. 퇴근이 4시 반이란다. 야야. 방학도 있단다. 야야. 예쁜 선생님도 많단다.(사실 이 부분에서 조금 흔들리긴 했다.) 야야. 공무원이란다. 연금이 많단다. 등등등. 나는 그렇게 엄마의 야야와 등등등에 등 떠밀려 교대에 입학하게 됐다. 떠밀렸다고 하기엔 난 너무나 쉽게 밀렸다. 꿈이라는 묵직한 추가 내 삶에 영글지 못했을 때였기에 아기 숨결에도 나부끼는 먼지들처럼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나는 내 진로를 결정해버렸다.
등 떠밀려 들어간 곳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내 학점은 시들시들 죽어갔고, 가끔은 학사경고에 제적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는 착한 아들이었다. 시험 때면 공부하기 싫다고 부모님께 응석 아닌 응석을 부리면서도 꼬박꼬박 출석까지 다 하더니 나중에는 과대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당시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부모님에게 등록금이 타학교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교대는, 그리고 졸업 후에 취업이 보장된다는 교대는 그야말로 가성비 최고의 대학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착한 아들이었던 나는 '이번 시험만 봐보자'로 3년 간 총 여섯 번의 고비를 잘 넘겼고, '이번 임용고시만 봐보자.'로 2년 간 총 두 번의 시험을 본 끝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버렸다. 그 후로 7년 간 나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열정적인 동료들과 함께 해맑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끝.이라고 쓰고 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을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이상 나같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멈춰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 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부모 탓만큼 누워서 침 뱉기인 것이 없다. 나의 행복하지 않음은 내가 나의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부터 왔음을 알았을 때, 나는 내가 겁쟁이인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1998년 IMF 사태 이후로 '안정'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한국, 저성장 시대에 공무원이 각광받는 이유도 아마 같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적 안정성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한 하루하루들이 아름답지 않은 적은 없었다.(여기서의 아름다움은 완벽한 대칭적 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조금은 일그러진 달항아리에 느껴지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학생이 응가를 하거나 토를 해서 치워야 하는 날도 모두 아름다웠다.(그렇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아름다웠다! 바로 이런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날들도 빛이 바랜다. 시간의 흐름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사안일의 열정적이지 않은 동료들보다 참기 힘든 건 그들보다 더 열심히 열정적이지 않은 내 모습을 바라볼 때이다. (오해 해지 말고 들으시라.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수준의 공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나라로, 교사의 질도 매우 우수하며, 학생 교육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선생님들이 참 많다. 다만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자괴감은 오래갔다. 아이들과 매일 여섯 시간의 수업과 다섯 번의 쉬는 시간, 한 번의 점심시간을 거치고 자리에 앉으면 나의 영혼은 이미 증발해버린 것처럼 멍한 날들이 꽤 오래갔다. 학생들을 교실에서 조용히 말하게 하는 것도 못하던 새내기 선생님일 때는 매일 저녁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아이들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려왔다. 학생들을 통제 못하던 나에게 행정 업무는 언감생심이었다. 교육청에 보고해야 하는 자료들을 보내고 나면 장학사에게 전화가 왔다. 다시 해야 한다고. 성취감은 없었다. 그보다는 외로움이라는 싹이 자라고 있었다. 씨앗을 뿌린 적도 없는데 바람처럼 날아와 무성히 자라나는 불청객 잡초처럼, 외로움의 풀들이 교실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외로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생님은 외로운 직업이라는 사실을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학생들이 왁자지껄할 때면 잠시 외로움을 잊었다. 그러나 다시 아이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교실에서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저경력 교사인 나에게 까지 내려온 여러 행정업무를 맡아서 할 때면 더 외로워졌다. 이러한 외로움은 무기력을 불러왔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오후, 홀로 수업 준비와 행정업무를 하면서도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들도 많았지만, 능력 안에서 성실히 했다. 그런데 그렇게 1년 1년이 지나면서 섬뜩한 느낌이 종종 들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처음에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착한 나에게 이런 일이!' 선생님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기에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돕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진 않았지만 장학금도 받으며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나였다. 또, 최고의 교사는 아니었지만 맡은 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외로웠고, 무기력해졌다. 이런 내가 각성하게 된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오랫동안 교육계에서 머물렀던 한 교수님의 책이다.(김인희, 교육혁신과 교육복지) 그 책에서 나는 교사들은 다양한 소외에 노출되어있다는 걸 알았고, 소외는 무기력을 불러올 수 있음도 알 수 있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무기력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며 성취감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무기력하고 소외된 삶이 아니라 활기가 넘치며 공동체와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은 위 질문들에 대한 나만의 답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왜 그것이 답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풀이과정이다.
우리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다.
선택의 시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선택 중 중요한 선택만을 골라서 그 선택들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미래로도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앞으로 할 선택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특히 이제는 100세 시대가 되었다. 누구든 쉽게 10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아지는 초고령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교육을 중심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과거를 거울삼아 또 다가올 날들을 과녁 삼아서 다뤄볼 것이다.
나의 답안지가 깨끗하기만을 바라던 날들이 있었다. 바로 시험이 끝나고 채점을 할 때다. 나는 평생 누군가에 의해 채점받고, 누군가를 채점하는 삶을 살았다.
이 책에 나온 나만의 답과 풀이과정이 모범적이지 않을 수 있다.(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일 수도 있다)하지만 이제는 삶이란 정답이 하나 혹은 두 개로 정해진 시험이 아님을 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로만 알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세상이 정해놓은 모범적인 기준과 싸우며 머리로 이해한 바를 실천으로 옮기고자 이 책을 썼다.
평가하지 않고, 평가받지 않는 삶.
나 자체로 소중한 삶,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
부족한 나라서 행복한 삶.
어쩌면 이 이야기는 철없는 어른이가 쓴 지루한 한풀이다.
동시에, 미처 철들지 못한 이의 일기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MZ 세대의 때 이른 초상화이며
피터팬 증후군을 앓는 다 큰 어른의 때늦은 반성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