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시작의 끝
5,4,3,2,1
해피뉴이어!
를 외쳐보지만 사실 그다지 감흥은 없다.
나에게 한해의 시작은 1월 1일이 아니다.
아아, 신정이 아닌 구정 때문이냐고?
아니다.
한국의 학년제와 학기제의 특성상 많은 교사들의 한 해는 3월부터 시작한다.
3월 1일이 삼일절로 휴무이니, 정확히는 3월 2일이다.
학교에서는 많은 것들이 3월을 기준으로 새로워진다.
내가 근무해야 할 교실도 새로워지고, 동료들도 바뀌며, 무엇보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바뀐다.
나는 올해 5학년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피동형으로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교사의 업무 및 학년배정을 인사권한을 가진 교장선생님이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년 및 업무희망서를 쓰긴 한다. 그러나 쓴 대로 자신이 원하는 학년이나 업무를 맡을 순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사실 나에게 5학년은 익숙한 학년이다.
10년이 조금 안되는 교직경력 중에서 5학년만 네 번, 그리고 이번이 다섯 번째다. 교직생활의 절반이상을 '열두살 아이들'과 지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초등학생이란, 곧 5학년이었던 것 같다. 딱 그맘 때의 아이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사실, 5학년 아이들은 나름(?) 가르치기 수월하다는 평을 받는 학년이기도 하다. (물론 학구마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고 해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천사'학년이라고 일컫어지는 4학년 만큼은 아니더라도 5학년은 '알잘딱깔센'하게 학교생활을 할 줄 안다. 학교도 4년이나 다녀서 익숙해졌고, 그래서 학교오기도 싫거나 두렵지 않다. 무엇보다, 사춘기가 아직 오지 않은 학생들이 대다수여서, 6학년 보다는 생활지도의 난이도가 높지 않다.(어디까지나 내 생각)
이렇게 개인적으로도 익숙하고, 아이들도 지도하기 괜찮은 5학년인데도 올해는 과거보다 조금은 어깨가 무겁다.
그건 내가 5학년 부장이기 때문이다.
부장교사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용어는 '보직교사'이다.
직장인 친구들과 만나서 내가 '부장'이라고 하면 벌써 부장달았냐고 하면서 한턱쏘라고 한다. 그런데 이건 정말 오해 중의 오해다. 학교에서 부장교사는 일반직장의 부장과 동급이 아니다. 승진한 것도 아니기에, 일반 교사들과 다를 게 없다. (학교에서의 유일한 직급은 교장-교감-교사. 이 세 가지다) 다만, '부장'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나 학년의 행정적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장교사'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행정업무도 업무지만, 보직교사로서 부장은 또 다른 임무를 맡는 데 바로 '학년대표'이다. 학년을 대표해서 회의를 들어가고, 의견을 개진한다.
부장교사가 처음은 아닌데, 학년 부장은 처음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뭔가 이끌어가야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따라만 다녔지, 내가 스스로 이끌었던 적이 없다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들이 내 입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긴장하던 찰에, 선배인 선생님이 계셔서 방향을 잡아주셨다.
이렇게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어색했던 첫만남과 다르게 두번째 만남은 그래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나의 교실 앞에 쌓인 교과서들은 가벼워보이지 않았다.
10개가 넘는 과목수대로 배송되어온 신학년 교과서를 나눠야했는데, 그 양이 어머어마 했다. 박스를 뜯고, 끈을 자르고, 나르고 쌓고, 수를 세고....를 반복하다보니 허리가 아파왔다.
'아...오늘치 데드리프트는 다 채웠다...'
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얼추 거의 다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과목별로 나눠진 교과서를 각자의 반으로 옮기고 나서야 작업이 종료되었다.
오손도손 둘러앉아 배달시킨 음식을 먹는데, 어제까지만해도 낯설게 보이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보였다.
불현듯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가족'
누군가는 직장에서의 관계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이면 족하다고 한다.
하지만 교사에게 직장은 아이들이 어른들을 보고 배우는 학교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므로, 관계성까지도 금방 캐치한다.
'선생님~ 2반 선생님이랑 친하죠?'
교사는 부모 다음으로 영향력있는 타인으로, 교사들의 말과 행동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런 그들에게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과 팀워크에 대한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
'Paragon'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 아니다.
'모범'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풀이해보자면 a person or thing that is perfect or has an extremely large amount of a particular good characteristic(출처: 캠브리지 영영사전)
'완벽하거나, 정말 훌륭한 특성들을 많이 지닌 사람이나 사물.'
교사는 신이 아니므로 완벽할 순 없다. 다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협력하지 못하는 사람이 협력하는 사람을 길러낼 수 없다.
말로만 하는 인성교육이 공허할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부탁드려요 우리동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