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결함, 영화 <무뢰한>

몸은 상처 뿐이나 마음만은 더욱 고상하지요

by Lia

<무뢰한>을 보았다. 김남길이 담배연기를 뱉는 소리가 영화관을 채웠다. 나는 쓸쓸한 것들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더 좋아하는 건, 그들은 절대로 쓸쓸하지 않다는 점이다.


포스터에 팔짱을 끼고 선 전도연을 보고, 추운 날 얇게 걸친 옷가지 아래 아주아주 야하고 낡은 속옷이 있을 것 같다는 미운 상상을 했다. 그 안에 숨겨진 마른 몸을 떠올리니 마음이 시큰시큰했다. 영화는 일정한 기승전결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느닷없이 시작한다. 전도연과 박성웅이 처음 나오는 장면에서 도대체 어느 배짱있는 감독이 베드씬을 찍으며, 박성웅의 첫 대사를 '황충남이 죽였어'라고 쓰나. 관객들은 아무도 황충남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스크린 속의 박성웅과 전도연은 나누던 사랑을 마저 나눈다. 나는 그 방을 몰래 엿본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불편함이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보통 애인이 있는 여자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때, 애인과 여자는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새로운 남자 때문이든, 다른 상황 때문이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삐걱거려야 한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도록 애매하게 사랑은 변하고, 영화는 새로운 남자를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이 그렇게 변하는 것일까. 무뢰한은 달랐다.


극 중 박성웅은 보스의 여자였던 전도연을 사랑하여 조직을 나왔다. 보스에게 진 빚 때문에 협박당하는 전도연을 위해 한 남자를 죽이고 도망자 생활을 한다. 전도연은 혼자 성남에 원룸을 빌려 살면서, 박성웅이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 이따금 소리없이 집에 들르는 박성웅을 안아주고 소리없이 보낸다. 박성웅이 오지 않는 날엔 마카오라는 주점에서 남자들의 술잔을 채워주고, 원하면 모텔을 잡아 새벽까지 일을 한 뒤, 쓰러지듯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한다. 이것이 그들의 사랑이다.


몸을 팔면서 애인을 기다리고, 김남길이라는 새로운 남자 앞에서도, 전도연은 자기가 갈 길을 간다. 갚아야 할 빚을 갚으러 다니고, 받아야 할 외상값을 받으러 다닌다. 그렇기에 김남길이 놀랄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같이 살자고 할 때, 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묻는다. 같이 살자는 게 어떤 사람들에겐 사랑의 속삭임이겠지만, 전도연은 그런 상냥한 사랑에 속을 수 없을만큼 너무나도 순진하므로, '진심이야?' 그녀가 바란 대답은 입발린 사랑의 말도, 장황한 미래 계획도 아니다.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것만이 궁금하다.


문제는 김남길의 대답이었다. 뭐라고 해야할 지 영화를 보는 내가 심각하게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그는 무심코 나와버린 진심같은 진심에 자신도 헷갈린다. 진심일까? 내가 진심으로 한 말이었나? 아주 이상하게도 그걸 고민하게 되고, 그러나 거기에서 진심을 마주 할 용기를 낼 수는 없으므로, '당연히 장난이지'하고 눈길을 거둔다. 그럼에도 나는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알았다. 영화를 본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의 진심이 느껴졌던 거고, 이건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름다움의 조건>이라는 이 매거진은 내가 본 아름다운 것들에서 조건을 하나씩 찾아 기록하는 매거진이다. 첫번째로 영화 무뢰한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었다. 무뢰한에는 수많은 아름다움의 모습이 담겨있으나, 그 중에 가장 내가 소개하고 싶었던, 사랑과 신뢰를 지키는 주인공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고결함에 있다. 술과 돈과 남자에 찌들린 전도연이라도,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진심을 요구할 수 있는 그 당당함. 돈을 받는 부정한 형사라도, 술집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려 눈동자가 갈 곳을 잃어버리는 그 순수함 말이다.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들 앞에서도 전도연의 눈을 보며 믿음을 잃지않은 박성웅의 사랑 말이다. 세상의 밑바닥이라고 할 만큼 영화의 배경은 어둡고 힘들다. 그런 환경 속에서 주인공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자신이 세운 기준을 외면하지 않고, 비록 아슬아슬하더라도 끝내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고결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선한 일을 행하며 동시에 수많은 부정을 일으키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고결한 것이 아니라,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연꽃처럼, 운명을 거슬러야 지킬 수 있는 자신의 고상함과 순결함을 끝까지 지켜내는 그들, 무뢰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