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서서 고전을 읽다>

궁(窮)의 시간, 나를 바로 세우는 고백

by 내려놔야 산다

​살아온 세월은 움켜쥐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쌓는 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증명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남은 것은 쥐면 쥘수록 살을 파고드는 무거운 부채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무게뿐이었다. 인생의 가장 깊은 수렁, 경제적 벼랑 끝에 서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실상은 나의 숨통을 조이는 밧줄이었음을.


​최근 논어를 읽으며 '군자고궁(君子固窮)'이라는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성인조차 끼니를 걱정할 만큼 바닥까지 치닫는 궁핍한 때가 있었다는 사실은 묘한 위로가 되었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으나, 그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것이 군자라고. 반면 소인은 궁해지면 비로소 흐트러지고 만다고.


​지금 나는 지독하게 궁하다. 경제적 상실은 단순히 통장의 숫자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존재의 기반을 흔드는 실존적인 공포다.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생존법은 역설적이게도 '내려놓음'뿐이었다. 여기서의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상황과 이미 엎질러진 실패에 대한 집착을 잠시 떼어내고, 오직 '나라는 존재의 중심'을 지키겠다는 치열한 의지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빚더미와 세상의 시선을 붙들고 밤새 괴로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 집착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최소한의 기력마저 앗아갔다. 손바닥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데도 놓지 못했던 그 욕망과 자존심을 비워내야만 비로소 숨을 쉴 공간이 생긴다. 비워진 그 자리에 절망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채워 넣는다.


​삶이 화려할 때는 보이지 않던 본질이, 모든 것을 잃어가는 지금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보인다. 껍데기가 다 벗겨져 나간 뒤에 남은 초라한 모습, 그것이 바로 내가 대면해야 할 진짜 나의 모습이다. 비굴해지지 않고, 이 궁핍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투쟁이다.


​이 공간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무너진 내면의 기둥을 다시 세우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다독이기 위해 적어 내려가는 가장 정직한 고백이다. 고통의 무게를 덜어낼 수는 없어도, 그 무게를 견디는 마음의 근육은 이 기록을 통해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나에게 말한다.

내려놔야 산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