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낀 자리에 고이는 평온>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벼워진 이유

by 내려놔야 산다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흐르는 야경을 보며 문득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질 때가 있다. 그날 나누었던 대화들을 가만히 복기해 보면, 어김없이 내가 말을 많이 했던 순간들이 가시처럼 걸린다. 그것이 상대를 위한 조언이었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옳은 말이었든, 혹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변명이었든 상관없다. 입 밖으로 쏟아낸 말의 양이 많아질수록, 이상하게도 내 영혼의 부피는 줄어드는 기분이 든다.


​말은 내뱉는 순간 내 통제를 벗어난다. 허공에 흩어진 말들은 누군가의 귀에 가 닿아 오해를 낳기도 하고, 때로는 나조차 다 지키지 못할 무거운 약속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말을 많이 한 날의 끝에는 늘 찝찝한 후회가 남는다. '그 말은 하지 말걸', '조금 더 참았어야 했는데'. 그 후회의 정체는 아마도 내 안의 고요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일 것이다.


​옛 성인 공자도 때로는 벙어리라는 오해를 받을 만큼 말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도를 설파했던 그였지만, 정작 가장 깊은 진리는 말 너머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말을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단단함을 유지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요즘 나는 말하기보다 듣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 노력한다. 입술을 굳게 닫고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그가 내뱉는 단어들 사이의 행간을 읽으려 애쓴다. 처음엔 어색했다. 침묵이 흐르면 내가 무언가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입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어느덧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아끼니 상대의 진심이 보이고, 억지로 상황을 주도하려 하지 않으니 주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듣기에 집중한 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내뱉은 말이 없으니 책임질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내 안의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한 채 돌아왔을 때의 그 충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온이다. 찝찝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요한 안식이 깃든다.


​성인의 경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말하고, 그보다 더 많이 듣는 균형을 찾고 싶을 뿐이다.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갉아먹는 칼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고 타인의 삶이 들어올 공간을 내어주는 가장 고귀한 배려임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큰 물결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고 있다. 억지로 노를 저어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기로 했다. 그 흐름 속에서 침묵은 나를 지탱해 주는 돛대와 같다. 거친 풍랑이 몰아쳐도 말을 아끼고 묵묵히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잔잔한 바다에 닿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말을 줄이니 마음이 단순해진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들이 정돈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빚의 무게를 토로한다고 해서 현실이 당장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말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차라리 입을 닫고 그 고통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나를 가장 잘 대변하는 방식이다.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내 입술의 감촉을 느껴본다. 많이 달아 있지 않고, 묵직하게 닫혀 있던 느낌. 그 느낌이 주는 안도감이 참 좋다. 말을 아낀 만큼 내 마음의 그릇은 더 넓어졌으리라 믿는다.


​내려놓아야 산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말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내려놓는 일이다. 나를 증명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을 침묵 아래에 묻어둘 때, 비로소 나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저 묵묵히 듣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내 진심은 내뱉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묵묵히 견뎌내는 나의 뒷모습에 담겨 있을 것이기에. 오늘도 나는 흐르는 대로 나를 맡기며, 침묵의 평온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말을 잃으니, 비로소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