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생각하며...
까무룩 졸다가 깼나 보다. 잠결에 놀라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다.
잠이 많아 아침 등굣길을 걷지 못하고 매번 뛰어가는 아이를 놀리다가 나도 잠이 늘었나 보다.
머리와 엉덩이만 바닥에 닿으면 잠이 쏟아진다. 아까도 설거지를 마치고 잠깐 앉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누워 있다. 이렇게 잠 많은 엄마가 새벽 마중을 오는 게 걸리는지
큰아이는 혼자 와도 괜찮다며 먼저 잠들기를 권한다. 나도 알고 있다. 미안해하는 아이의 마음도 알고
우리 동네 귀갓길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새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차도와 인도
사이에 안전펜스가 생겼고, 가로등도 많이 늘어 어둑하다 싶은 곳도 없다. 경찰이 순찰도 자주 돌아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짧은 사이에도 두 번에 한 번쯤은 경광등을 켜고 조용히 지나가는 경찰차를
만난다. 이렇듯 밤거리가 안전하다 생각되는 우리 동네지만, 새벽마다 길에 나가서 기다리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다.
시계를 다시 보니 한 시 십 분, 이 시간까지 출발을 하지 않았으면 독서실이 마감하는 한 시 반이 되어야
출발한다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겉옷을 걸치고, 길냥이 밥이 든 지퍼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서는데 10월의 밤바람이 지나갔다. 불과 며칠 전까지 9월이었는데, 살에 와서 닿는
바람은 이제 겨절이 가을로 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얼룩이가 와서 야옹거린다.
이 녀석은 식탐이 많은 만큼 조심성도 많아서 몇 달째 먹이를 주는 데도 가까이 가서 머리 한번 쓰다듬어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큰 아이는 사료도 맨날 먹으면 질릴 거라며 자기 용돈을
털어 간식을 사다 바쳤다. 하지만 두어 걸음 떨어져서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캔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서도 이쪽에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는 기색만 보이면 움찔거리며 뒷걸음쳤다.
서운해하는 큰애를 길에서는 사는 아이들은 저렇게 해야 오래 살아남는다며 달랬다. 늘 사료를 주던 곳에
살짝 부어주고 단지를 나섰다.
길을 건너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아이가 출발했는지 확인한다. 늦은 시간 혼자 집으로 귀가하는 아이들을
위해 독서실에서 보내주는 출발 알림 문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니
걷는 걸음이 더 느긋해진다. 큰길 양쪽으로 늘어선 아파트 단지에는 간혹 불이 켜진 집들이 있다. 역 쪽으로
고갯길을 내려간다.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인가 보다. 자기 몸만 한 크기의 배낭을 멘
아이들이 드문드문 나를 지나쳐간다. 핸드폰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걷는 아이도 있고, 눈을 반쯤은 감고
걷는 아이들도 있다. 가끔 구겨진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쪽의 어깨가 처져 걷는 어른들도 그 길을 오른다.
아이도 어른도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리를 끌다시피 하면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말하지 않아도
고단함이 전해진다.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아서 걸음이 빨라진다. 독서실 건물 앞에 도착해서 아이가 아직 출발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목마른 나도 마시고, 아이도 하나 먹일 생각에 일 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2+1'하는 초콜릿 우유를 샀다. 냉장 판매대에 마지막 하나 남아있던 참치마요 삼각김밥도 집어 들었다.
잘 사주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번씩 쥐어주면 늘 어깨춤을 추며 좋아했다. 한참 시장할 시간이라 엄마의
얼굴보다 먹을 것이 반가울 아이에게 우유와 김밥을 내밀 생각을 하니 내가 먹은 것처럼 배가 불러왔다.
우유를 하나 열어서 마시는데, 문자 오는 소리가 들린다. "김ㅇㅇ님이 지금 출발합니다." 뒤를 이어 바로
오늘 학습시간은 얼마라고 몇 시간, 몇 분까지 적혀서 또 한 번 문자가 온다. 피곤한 아이의 왼쪽 어깨엔
몇 시간, 오른쪽 어깨엔 몇 분이란 글씨가 쓰여 있을 듯하다.
일 층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아이 얼굴이 보이는데,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함께다.
우유 하나를 친구에게 쥐어주니 웃으면서 꾸벅 인사를 한 아이 친구는 반대편 길로 사라졌다. 집을 향해
걸어오면서 우유에 삼각김밥을 같이 얹어주니, 아이가 말한다.
"엄마, 초콜릿우유랑 참치김밥이 맛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살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유랑 참치를 함께 먹는다고 상상하니 내 입속에서 비린 말이 나는 것 같다.
할 줄 아는 요리는 달걀 프라이와 라면 밖에 없는 녀석이 입맛만은 대장금이다.
"그래서 안 먹는다고?"
"아뇨. 그냥 그렇다는 얘기죠. 먹어야죠."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30여 년 전의 내 얼굴이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