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생각하며...
우리 때는 밤을 새워 24시간을 여는 독서실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동네에
같은 학교 친구가 없던 나에게 독서실 친구는 두 살 위 친언니였다. 새벽 한, 두시까지 수다도 떨고,
놀고 아주 가끔은 공부도 하다가 독서실을 나서면 항상 엄마가 아래층 계단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하는 가게도 없고, 편의점도 없던 시절이었다. 한창 먹성이 좋은 우리는 저녁을 먹었어도
그 시간이면 항상 배가 고팠고, 엄마는 김밥을 둘둘 말아와서 우리들에게 한 줄씩 쥐어주곤 했다.
썰지도 않은 김밥을 손에 들고 우적우적 씹으며 버스로 두 정거장인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김밥 속엔 별 게 없었다. 저녁 밥상에 올랐던 나물들이 들어있기도 했고, 씻은 김치가 속을 채우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속에 무엇을 넣었든 새벽 두 시에 바람을 맞으며 길에서 먹었던 그 김밥만큼
맛있는 김밥을 그 뒤로 먹어본 적이 없다.
한 손엔 우유, 다른 한 손에는 삼각김밥을 들고 번갈아 한 입씩 먹느라 아이의 걸음이 느려졌다.
메고 있던 가방을 건네받아 내 어깨에 올리니 아이쿠 소리가 절로 나오게 무겁다. 아이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걷는다. 손바닥 만한 가방도 아이에 비해 크게 느껴지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참 많이 컸다. 한창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를 데리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왔었다.
아이는 늘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엄마들이 데리러 오는 친구들을 부러워해서 가끔은 걸어서
아이를 데리러 갔다.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그 자체로 놀이터였다. 아이는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을 궁금해 했고, 어느 가게를 가야 간식이 생기는지
알게 되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인도를 뛰어다니며 보도블럭을 뚫고 올라온 풀들에게 말을 걸었고,
길에서 만난 고양이들에게 자신의 간식을 나누어 주면서 자랐다. 책에서 배우는 것이 있듯 길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었다.
"엄마. 건너요." 하는 아이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양쪽 차선에 오고 가는 차가 한 대도 없다.
주황색 신호는 초록색 신호와는 달라 횡단보도를 건너는 발걸음을 숨차게 재촉하는 힘이 있다.
무거워지는 배낭을 추스르며 걷는데, 아이가 뒤에서 뛰지 않아도 된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차가 없는 걸 눈으로 보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뛰다시피 걷고, 아직 밤길이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뛰는 엄마가 이상하기만 하다. 혼자서 걷던 길을 둘이 함께 걸어
집앞에 도착한다. 그새 식사를 다 마쳤는지 깨끗해진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갓 구운 식빵 모양을
하고 있던 얼룩이가 우리를 보고 천천히 다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는다. 언제 남겨뒀었는지
아이는 삼각김밥의 부스러기를 가져주었고, 뒤로 물러나자 녀석은 느릿하게 다가와 천천히 맛을
보며 먹는다. 먹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돌아서는데, 낯익은 새벽 바람이 뒤에서 살랑 불어왔다.
그때였다. 늘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만으로 새벽길을 나선다고 생각했었는데, 온전히 그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공동현관으로 들어서는 딸아이의 뒤를 좇아서 계단을
오르려는데, 뒤에서 30년 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쟁반 들고 지나가게 문 좀 잡아."
뒤를 돌아보니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언니가 김밥을 물고 걸어올 때 뒤에서 따라오던
엄마의 손에 들렸던 쟁반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혹시나 김밥을 먹다 목이 메일까봐 엄마는
연하게 끓인 된장국을 그릇에 담아 숟가락까지 찔러넣고, 매일 새벽 혼자서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왔다. 떠들면서 먹다가 사레 걸려 캑캑거리면 엄마는 어느 틈에 뒤에서 국그릇을
내밀며 서 있었다. 오래전에 머리가 잊어버린 엄마와 걸었던 길을 가슴은 기억하고 있었고,
잠 많은 나는 그 추억으로 새벽마다 아이를 데리러 그 길을 나설 수 있었나보다.
"엄마. 안 와요?" 아이가 자동으로 닫히는 공동 현관문이 닫힐까봐 문 틈에 발을 끼워넣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올라가 아이 옆에 섰다. 그새 눈 주위가 뜨끈해진 게 느껴져서 누가
볼세라 양쪽 눈을 비볐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빨간 화살표와 함께 하나씩 작아지는
숫자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이의 하품소리가 들린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딱딱하게 뭉친
딸의 뒷목과 어깨를 주무르는데, 내 어깨에도 어느새 두툼하고 따뜻한 손이 와서 얹힌다.
너무 익숙한 그 손의 주인공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한 번은, 꼭 한 번쯤은
친정엄마를 보셔다가 큰아이 마중을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김밥을 만들고 엷은 된장국을
끓이던 30년 전의 젊은 엄마와 어린 딸로 돌아가서 오늘 아이와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이번에는 꼭 내가 쟁반을 들어드리고 엄마에게 많이 고마웠다고 말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