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될 이유는 뭐죠?
어쩌다 보니 다양한 언어 배경을 가진 동료들과 일하는 역동적인 경험을 하는 중입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만났던 팀 멤버들은 주로 영어와 모국어 (스페인어, 필리핀 따갈로그, 프랑스어, 한국어, 힌디어 등) 정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유럽에 있는 현 직장의 동료들을 보면 고향의 언어와 영어, 거기에 더해 제3 혹은 제4의 언어까지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변에 3-4개 국어를 하는 사람이 발에 차이게 많다 보니 (... 표현이 좀 그렇지만 저희 회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나는 한국어와 영어 딱 이 두 개의 언어밖에 못하는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 하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21세기 경쟁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도대체 몇 개의 언어를 할줄 알야아 하는 걸까요?
저를 동요하게 만든 제 주변인들에 대해 잠깐 이야기드려보고자 합니다. 다 쓰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 가볍게 3명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 팀장님
저희 팀장님은 금발에 파란 눈, 스위스 국적의 40대 아저씨입니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서울 출생이십니다. 부모님께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7080년대에 한국에 오셨다가 서울 제일병원에서 출생한 후 약 2년간 무국적자로 계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온 가족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20살까지 자라며 집에서는 어머니어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쓰고, 학교에서는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동시에 학교에서 영어도 배웠다고 합니다. 약 20여 년 전 스위스로 이주 후, 이탈리아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이탈리아어도 하십니다. 그렇게 저희 팀장님은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이탈리아어 총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2. 동료 K
제 나이 또래의 동료 K는 보스니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초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해 온 가족이 난민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스웨덴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대기하다 K의 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화장실에 다녀오니, 원래 타려던 배가 떠나 남아있던 유일한 선택지인 덴마크행 선박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녀는 덴마크에서 덴마크어와 영어로 교육을 받으며 덴마크 국적을 획득하였습니다. 그 이후 K는 대학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모두 제네바 대학교에서 거치며 프랑스어와 영어에 더더욱 익숙해졌습니다. 그 결과, 현재 K는 보스니아어, 덴마크어, 영어, 프랑스어를 모두 유창하게 합니다.
3. 옆 팀 팀장 P
P는 독일어를 하는 어머니와 프랑스어를 하는 아버지를 두었기에 두 언어 구사력을 어린 시절에 탑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포르투갈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밟으며 영어와 포르투갈어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엔 프랑스어와 영어로 대화를 하다가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어나 포르투갈어로 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을 할 때 가장 편한 언어는 무엇인지 말이죠. 옆에서 보면 신기할 정도로 한 언어에서 다른 연으로 즉각 변경해서 솰라솰라 가능한 이들이 업무 시 선호하는 언어가 뭘까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당연히 영어지.
다들 입을 한데 모아 대답했습니다.
비록 일상생활이나 대화는 여러 언어로 가능하지만 서류 업무와 같은 공식적인 일을 처리할 때에는 영어가 편하다고들 하더군요. K는 학생 시절동안 대부분의 에세이 과제나 논문 등을 영어로 작성해 왔고, P는 프랑스어보다 영어로 표현하는 게 훨씬 더 명료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영어를 선호한다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 중 그 누구도 한국에서와 달리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영어 공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육을 영어로 받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영어로 의사소통하며 자연스럽게 습득했다고들 합니다.
사실 제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노는 건 죄악'이라는 무논리 개념을 부모님으로부터 주입받은 저는 유럽에 온 이후로 퇴근 후의 한가로운 삶에 슬슬 대상 없는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뭐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내 2개의 선택지를 스스로에게 제시했습니다.
1) 현지어인 프랑스어를 배운다.
2)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석사 과정을 밟는다.
저는 결국 2번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종사하는 분야의 세계 공용어는 영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에 더해 ChatGPT와 파파고의 대단한 언어 능력을 체험하고 나니 굳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필요한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미 잘 아는 언어를 더 깊이 발전시키고, 관심 주제에 있어 critical analysis 능력을 키워 전문성을 키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을 석사 과정 내내 후회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석박사 해내신 분들 다들 존경합니다.)
제 결정과 다르게 '그래도 생활은 현실인데 공부에 앞서 현지어를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현지어를 못한다는 게 개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경험을 한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직장에서 정치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동안 정치질에 질려 퇴사한 직원이 꽤 되는 걸 보니 저희 회사 내에도 정치질로 인한 문제가 상당 수준인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저희 회사 공식 업무 언어는 영어이지만, 직원들끼리 대화할 때는 다수가 현지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현지어를 모르는 저는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정치질에 휘말릴 일 없이 마음 편하게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 몰라도 되는 것을 모른 채 살 수 있어서 근심을 덜었다고나 할까요. '그게 뭐 좋은 거냐'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머릿속이 꽃밭이면 얼마나 행복한데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야 자발적으로 언어를 공부해도 상관없지만, 언어보다 다른 것에 집중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처럼 2개 국어밖에 못하는 사람도 하다 보니 (비록 두 달 후 퇴사 예정이지만) 직장 생활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어가 본인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서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것보다 한 가지 언어로라도 본인의 의견을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피력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러면 외국 생활을 하면 할수록 한국어도 못하고 외국어도 못하게 되는 0개 국어의 늪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어 실력이 많이 부족해졌다고 느낀 요즘 저는 한글로 쓰인 판타지 소설을 접하고 있는데요, 매일 읽으면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이렇게나 표현이 풍부하고 섬세한 '한글'이라는 언어를 읽고, 쓰고, 듣고, 말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Christian Lu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