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결혼 3년 차.
아직도 종종 내가 기혼이라는 것을 까먹을 만큼 자취생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구직 활동 중에는 내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심장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나는 국비지원 학원에 다니기 위해 지역 고용센터에서 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았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몇 번 상담을 해야 한다. 나의 상담 선생님은 50대 중반의 남자분이셨다. 내가 처음 9개월 과정의 코딩 교육학원에 등록하겠다고 말하자 약간 말문이 막히셨던 그분.
그리고 나의 말문을 막히게 했던 그분의 질문은,
"남편이 허락해줬어요?!"
"9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복 4시간 넘는 거리를 꾸준히 다니실 수 있을지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소득이 없는 부분에 대해) 남편과 충분히 상의하시고 결정하신 거죠?"라는 질문을 간단하게 줄여서 하신 거겠지..
...라고 생각 하기엔 상담받을 때마다 같은 질문(혹은 감탄)을 반복하셨다.
이 나이에 9개월 동안 새로운 것을 배워서 취업하려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칭찬도 많이 해주셨지만 은연중에 이것을 허.락.해준 남편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계속 "9개월 동안 남편 혼자 외벌이 해야 하네요? 허허.. 참... "이러면서 감탄(?)을 자꾸 하셨...
물론 이 말은 유부녀뿐 아니라 유부남도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거의 1년 동안 소득 없이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것은 배우자의 지지가 꼭 필요하긴 하다. 그래도, 남편이든 아내든 부부 사이에는 '허락' 보다는 '상의'나 '의논' 같은 단어가 더 알맞다고 생각한다. 그 직업상담사 분도 좀 아셨으면.
다니고 싶은 학원을 고르고 상담 신청을 하면 곧 전화가 온다. 전화로 간략히 대화를 나누고 방문 날짜를 잡는다. 전화, 방문 두 번의 상담을 통해 취업의지가 있는 학생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두 번의 상담 중 내가 들었던 질문은 임신에 관한 것이었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임신 가능성이 있는지 물으셨는데 첫 번째 전화 상담 때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어서 당황하며 임신 계획이 없다고 짧게 답했다. 이 학원에 꼭 다니고 싶었던 나는 방문 상담을 대비하며 마치 면접 보듯이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했다.
그리고 상담하는 날, 임신 계획이 전혀 없음을 손사래 처가며 열심히 어필한 내 모습에 현타가 왔다.
이렇게 사적인 부분에 대해 막 물어봐도 되는 건가..
예의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예의 없는 질문 아닌가..
아니 난 또 왜 그걸 그렇게 열심히 필사적으로 대답한 걸까...
그래야 내 간절함이 드러나고 내가 혹시라도 임신할까 봐 우려하는 학원 관계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아니 근데 여기까지 상담하러 온 사람이면 교육 기간 동안 임신 계획을 안 세우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것 아닌가?
만약 내가 기혼 여자가 아닌 기혼 남자였더라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까?
솔직히 학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도에 포기하면 학원도 손해, 학생도 손해, 지원해주는 정부도 손해, 내가 뽑히는 바람에 못 들어온 다른 지원자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교육 과정 중의 임신은 그 누구도 이득 볼 것이 없는 손해인 것이다. 100% 이해한다. 그런데 그 손해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온 몸으로 방어하는 것이 왜 나여야만 하는 걸까.
정부에서 임신으로 인한 중도 포기의 경우 발생하는 손해에 대한 버퍼를 마련해줄 수는 없을까. 출산 장려 예산으로 학원의 손해를 일부 보전해준다면 학원 입장에서도 기혼 학생들을 받는데 부담이 덜 할 것이다. 물론 공짜 강의만 듣고 취업은 안 하는 등의 악용 사례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취업을 목표로 긴 시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신 계획을 일부러 세우지는 않는다. 만에 하나 생각지 못한 임신을 했더라도 그 책임을 내가 혼자 지고 눈치 보는 것이 아니라 축하받으며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임신 계획 있냐는 질문보다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만큼 끝까지 갈 수 있게 조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학원 등록 과정에서부터 난 절대 임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절박하게 증명해야 하는 것이 참 씁쓸했다.
입사 면접 시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임신에 대한 질문은 많이 받지 않았다.
"혹시 임신 계획 있으십니까?"에 대한
예상 대답 1 : "눼에? 임신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애를 납니까? 저희 부부는 딩크족입니다."
예상 대답 2 : "계획이 없다 해도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귀사에는 출산 관련해서 어떤 복지가 있는지요?"
당연히 1번 대답을 했다. 그것도 뒷문장만 심플하게.
요즘은 이력서에 미혼/기혼 표기를 잘 안 한다. 그 덕분에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보시는 분도 계셨고(당연히 미혼이라고 생각하신 모양) 기혼이라고 밝히자 이력서 한 귀퉁이에 '직업: 주부'라고 적으시는 분도 계셨다.
기혼 여자는 당연히 직업이 주부인가요? 그냥 취준생이나 백수라고 해주시면 안 되는지?
(직업이 주부라기엔 집안일을 너무 안 한다...ㅜ)
요즘은 성차별 이슈때문에 임신 출산 관련 질문을 덜 하나보다. 다행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런 질문을 하는 면접관들이 존재하고 그 질문 앞에 여전히 움츠러드는 (여성)지원자들이 존재한다. 유부남은 책임감 있을 거라며 환영하고 유부녀는 육아휴직 쓰고 퇴사할까 봐 꺼리는 부분이 분명 있는 듯하다.
그래도 차라리 이런 질문을 하는 회사는 믿고 거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회사는 어떠한가!
- 면접 볼 때 미혼/기혼 안 물어봄, 오직 인성과 기술적인 부분만
- 입사 첫날 기혼임을 조심히(?) 밝혔다. 면접날 그 부분을 확인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호옥시라도 나중에 내가 기혼인 것을 알고 당황하실까 봐(이상적으로는 결혼 여부는 근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어야 하지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기혼임을 밝혔다. 대표님은 무심히 노트북 두드리면서 '아 그러네요 아까 제출하신 가족관계증명서 보니까' 하고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임신할 건지 말 건지도 체크하지 않으셨다!
- 입사 후에도 서로 사생활 얘기를 많이 안 하는 분위기라 너무 좋다.
가임기 기혼여성이 취업할 때는 남편의 허락 여부와 임신 계획, 그리고 직업이 주부라는 말을 듣는다.
+ 가임기 미혼여성이 취업할 때는 결혼 언제 할 거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