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낸다는 것을 아는 것.
4060 중년의 삶에서
최근에 중년 문화 관련 자료를 작성해야 해서 4060 신중년이라 불리는 세대에 대한 기사들을 많이 스크랩 하였다. '은둔 청년' 관련 기사는 많이 봤었는데 은둔 청년만큼이나 '은둔 중년' 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기사와 전 세대 중 4060 중년 고독사 비중이 높다는 데이터를 보니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퇴직, 은퇴 이후에 갑작스럽게 찾아 오는 우울증, 불안, 사회적으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좌절감, 자연스럽게 끊어져 가는 인간 관계들 속에서 집 밖 외출이 줄어들거나 사람들과의 만남도 꺼려지게 되는 경우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복지들이 청년과 노년층에 집중되어 있어 사이에 낀 세대인 중년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나 지원 가능한 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상황으로 느껴졌다.
나 역시 이제 청년에서 중년의 나이로 접어 든 만큼 이러한 뉴스 기사들이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 암담한 마음도 들었다. 언젠가는 나 역시 사회적으로 뒤로 밀려나고, 다른 대안들을 찾아 인생의 이모작을 잘 설계하지 못한다면 중년의 나이에 사춘기와 같은 방황이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인생이 100세 시대를 살게 될 것이라는 기사들이 나온지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최근에는 130세까지 살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한 뉴스를 접할 때 마다,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장수하는 삶의 원하는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근간은 무엇일까?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인가? 참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인 것 같다. 나에게 만큼은 장수하는 것이 좋은 뉴스 거리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 그렇게 오래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의학의 발달과 건강한 삶을 위한 정보가 대중적으로 매체를 통해 용이하게 전달 되다 보니 평균적으로 누릴 수 있는 건강이 이전 시대보다 확실히 높아져 있음이 느껴진다. 10년 전에 내가 조직에서 바라 봤던 40대 부장님의 모습과 현재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나의 40대는 중년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것 같은 청년의 싱그러움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4060세대도 이만큼 여전히 젊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절대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퇴직은 빨라졌고, 자식들은 삼포 세대에 캥거루족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나이드신 부모님 역시 100세 시대를 살고 있으니 4060세대는 자식과 부모와 본인 자신까지 챙기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왔나? 를 되짚어 보면서 지금 현재의 나와 앞으로의 내 삶을 산의 능선 위에 그려 보았다. 1020세대에는 나름 독립적이고 도전적으로 내가 처해진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그 안에서 '나' 라는 인격체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라고 느낄 때 진짜 행복이라고 한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선택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에게 엄청난 존경과 위로를 지금도 가끔씩 보내곤 한다. 30대에는 그 동안 내가 쌓아 왔던 모든 융합 지식들의 실천편과 응용편과 같은 시기였었다. 그래서 한해 한해가 동적으로 활기차고 신나고 무언가로 꽉꽉 가득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40대를 맞이 하였다. 중년에 접어든 것이다. 40대를 1년 앞두고 있는 친구는 40대가 무슨 중년이냐면서 50대부터 중년이라고 설득하려고 하였지만, 나는 어짜피 들어야 하는 것이 나이라면 조금 더 빨리 나이듦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빠른 인정이 오히려 성숙한 미래를 설계하는데 있어서 도움이되는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굳이 받아들이지 않고 중년의 들어섬을 늦출 필요가 있나? 청년이나 중년이나 어짜피 단어에 불과하고 그것이 바뀐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 않나? 단순히 인생의 다른 차원에 들어섬으로 인해서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 좀 더 현실적이고 깊은 시각이지 않을까 - 인생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좋은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 하산의 느낌을 인정하고 만끽한다. 작은 자아의 정체성과 신념으로 살아왔던 지난 날의 나에게 충분히 고생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감사하다 말하며 놓아주고,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큰 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무한한 가능성 위에서 덤덤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새롭게 나에게 다가오는 에너지와 주파수들로 부터 평온함과 고요함, 풍요로움을 느끼며 남은 산행을 힘껏 해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막길에서 포기하지 않고 늘 성취를 이루어 나갔던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잠재된 에너지가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이 산행을 응원해 주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