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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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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Oct 09. 2020

21. 아이는 부모에게 빚지지 않았다.

너의 행복한 미소, 그거면 됐어

하기오: 여전히 효도는 하고 싶어요.

사이토: 왜 그렇게 생각하죠?

하기오: 저도 신기해요(웃음). 곁에 있으면 무서워서 같이 있고 싶지 않지만 늘 '키워주었다'라는 고마움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어쨌든 부채를 갚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사이토: 점점 빚이 불어나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하기오: 빚의 이자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게라도 갚아나갈 수 있으면 죄책감은 줄어들 테고, 상대도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거라 위안하는 거죠.


<나는 엄마가 힘들다> p.142 사이토 다마키




이제 하레와 나는 서로의 옹알이도 척척 알아듣고,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한다.

하레가 아기 코알라처럼 나에게 착 붙어있는 시간이 버겁고 두렵기보다는 점점 편안하고 즐거워지고 있다.

17kg나 되는 아이를 얼싸안고 다니는 그 무거움도 잊게하는 '정신적인 무언가'를 하레도 나에게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베푸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주고받는 '인간관계'라는 느낌.

부모와 자식도 그냥 '관계'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거지, 자식이 부모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거나 '복종'해야 하는 관계는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어린애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아!'라고 했어요"하고 말했더니, 엄마의 언니인 둘째 이모는 "어머, 정말 그랬어? 소름이 돋는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소름이 돋는다는 건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자식은 원래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레라는 아이안에 온 가족의 모습이 다 들어있었다.

하레엄마, 하레아빠, 나,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심지어 하레가 태어나기 한참전에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를 똑닮은 행동을 할때도 있어 놀랍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섞여서 이 아이 안에 응축되어 있으면서도 이 아이는 또한 '독특한 개인'이기도 했다.

가만히 아이를 바라볼때면 그저 신기하고 신비로울때가 많았다.


하레를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은 우리를 당연하게 '엄마와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은 몸의 모양, 눈썹, 웃을 때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 '똑같이' 생겼다.


동글동글하고 튼튼한 몸.

나는 그런 내 몸을 한평생 미워하며 전쟁을 벌였다.

내 몸을 굶기고 학대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다이어트를 한 세월이 너무 길고 당연해서 '더이상 이렇게 살다간 죽을 것 같다'의 상황이 되어서야 내가 섭식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내 몸'은 외할머니, 엄마, 나, 그리고 하레에게까지 4대째 이어져 내려가고 있다.

그런데 뭐지?

하레는 너무 귀엽잖아. 하레 몸은 너무 귀여워. 사랑스럽다. 

나는 하레가 자신의 몸을 미워하거나 뜯어 고쳐야 한다고 '나아져야'한다고 자신을 학대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피해망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여자들은 남 탓을 통해 어머니의 양가감정을 처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나고 언짢은 감정을 아이의 잘못으로 여기면서 죄책감보다는 분노를 느끼며, 자신들의 감정을 마음속에 가둬두지 않는다.
그런 감정을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고, 자신들의 내적인 문제가 아이들에게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이런 여자들의 경우, 괴물 같은 아이들은 늘,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어머니의 투사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p.173 - 바바라 아몬드


그런데 나는 어째서 내 몸을 그렇게까지 미워하게 됐을까?

물론 서구화된 미의 기준이나 대중문화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나의 20대 초반 무렵에는 '헤로인 쉬크'라 불리는 마르고 퀭한 여자들이 '쿨'하다 여겨졌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늘 내 몸을 보며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했다.

자기랑 '똑같이' 생긴 내 몸을 보면서 말이다.


자기자식은 다 예쁘다던데, 난 아니야.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

라며 허벅지가 '이따~만하다고', 엉덩이가 '이마~안하다고' 양 팔로 과장된 크기를 그려가며 말했다.


내가 17살때, 엄마는 와코루의 핑크색 거들을 사다가 입으라고 했다.

너의 허벅지를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했다.

허벅지 중앙을 압박해서 분홍색 도시락 소세지같은 모양이 된 다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절망했다.


하레의 다리를 보며 사람들이 말하곤한다.

"와! 이 녀석 허벅지 좀 봐! 얘는 운동 시켜야겠네!!"


그런 하레를 보며 내가 '뭐야, 그냥 귀여운 몸이잖아?'하는 '사랑스러움'을 발견했다면, 엄마는 자신과 똑 닮은 내 몸을 보면서 '뜯어 고쳐야 할 점'만을 봤다.

나를 자신의 미니미로 여기고 자신이 '싫어하는 부분'을 뚝 떼어내어 나에게 투사한채 자신의 감정적 쓰레기통으로밖에 이용하지 않았구나.

그만큼 엄마는 마음이 병들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구나.

그런 엄마의 황폐한 내면을 생각하니 불쌍하면서도 화가 났다. 




우리는 몸을 당연히 존재하는 것, 적당한 영양이 주어지면 타고난 유전적 기질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리치료사로서 몸의 문제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본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이 신체적 감각을 발달시키는 데는 어릴 적 경험한 신체접촉과 그 어머니가(혹은 다른 보호자가) 스스로 품었던 육체적 자의식이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몸은 DNA의 청사진이 충실히 이행된 결과 이상의 무엇이다.

<몸에 갇힌 사람들> - 수지 오바크


나는 이제 다이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나 자신과 전투를 치르느라 정작 중요한 싸움에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사랑하며 잘 먹이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평생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며 살았더니, 다이어트를 그만두는 게 더 힘들었다.


44에서 66사이즈가, XS에서 M사이즈가 된 건데도 내가 물소처럼 살쪘다는 기분이 들어 두려웠다.

하지만 이게 '잃어버렸던, 원래의 내 몸'이다.

요즘 나는 내 인생의 그 어느 시기보다 건강하고 활기차다.






아이는 만3세가 되기까지 평생할 효도의 90%를 한다고 한다.

하레가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파인애플 머리를 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통통한 손으로 무언가를 조물조물 만들어도,
나를 보고 씩- 웃어도,
얼굴을 찡그리며 울어도,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면 식식거리면서 고개를 쳐박고 퍼먹어도,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먹은 딸기냄새를 폴폴 풍기고만 있어도 아아 너무 귀여워!! 하고 가슴이 녹아내릴 때가 많다.


정말 미성숙한 생명체에게 '귀여움'이란 막강한 무기구나.

이 귀여움이 바로 효도구나.


금요일 밤, 서울로 올라가는 밤버스 안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앞으로 이렇게 얼마나 될지 모를 시간을 내 인생은 당분간 옆으로 밀어둔채 하레네집을 오가면서 지내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 하레를 돌보는 일이 힘들때도 있고, 어린이집을 마칠 시간이 되면 겁에 질릴때도 있지만 하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하레는 '존재'만으로 나에게 기쁨이다.


자라면서 아이는 예쁜짓으로 효도 다 한 거라고, 커서 효도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웃으면서 잘 놀고 잘 자라주는 것. 

아이의 귀여움, 사랑스러운 존재만으로도 나는 이미 다 보상받았다.


무한하게 주는 사랑, 그럼에도 항상 기쁘게 베푸는 사랑.

주면서도 채워지는 느낌.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하레는 나에게 온걸까.


어린이집에서 어버이날 선물을 만들어 온 날의 하레




나는 엄마를 엄마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싫어했다.
 <시즈코상> p148 - 사노 요코



내가 유치원시절부터 엄마에게 주기적으로 듣던 이야기가 있다.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허공 어딘가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며 처녀 시절 자신이 얼마나 우울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죽으려고 동네 약국을 돌며 약을 '한 알, 한 알'사서 모았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게 어린 딸에게 할 소린가 싶지만, 어렸을 땐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그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엄마가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자기 인생의 불행들을 구구절절 늘어놓다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면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재왕절개한 배의 흉터를 보여주며, 목소리를 가냘프게 떨어가며 말했다.

"여기를 이렇~~게 찢었어. 이건 너, 이건 ㅇㅇ(하레아빠)."

난 늘 내 생명을 엄마에게 빚지고 있는 영원한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빚은 절대로 탕감되지 않는다.

그런 죄책감이 커져서 나를 짓누를 때면 '아니, 누가 낳아달랬어? 자기 맘대로 낳아놓고는!'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엄마는 정말 밀린 빚이라도 받아내야 한다는듯이 늘 나에게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받아낼 수 없을 땐, '차갑다', '이기적이다', '냉정하다'며 모진 비난이 돌아왔다.


자신에게 '온전한 집중'을 요구하는 하레를 보며, 영유아기에 듬뿍 받았어야 할 사랑을 못받은 엄마같은 사람들은 가슴속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이 생기나보다,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무슨 수를 써서도' 기어코 받아내려고 한다.
심지어 그게 자기 자식이라 할지라도.

나는 늘 엄마가 애정을 과잉 청구하는 보험 사기꾼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따스하게 '받았던' 기억은 없는데, 나에게는 늘 극심하게 요구하곤 했으니까.


하레를 향한 내 마음이 애틋하고 커져갈수록 내 안의 상처가 아프기도 했다.
어느 날은 심지어 '하레를 질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하레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나도 받고 싶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


하레를 돌보면서 엄마가 왜 그렇게 자신의 '작은 사랑'에도 생색을 냈었는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잘 먹고 잘 자라면 그냥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엄마는 자식을 키워서 도대체 '무슨 소용'을 바랐던걸까?


아이는 부모에게 빚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나도 엄마를 향한 끝없는 죄책감을 떠나 보내려고 한다.




뇌 영상 연구에 따르면 엄마들이 자신의 아기가 웃는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중격의지핵 nucleus accumbens'이라는 보상 중추의 회로가 켜진다고 한다. 

꽃을 보거나 초콜릿을 맛보고, 오르가즘을 느끼거나 복권에 당첨될 때에도 바로 이곳의 회로가 활성화한다. 그러니 사회적 미소가 강렬한 쾌감을 준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 모습이 모두 가짜라면 The self illusion> p.87 - 브루스 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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