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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날 Nov 10. 2024

계속 쓸 용기

 나의 취미는 파도다. 밀려왔다 금방 부서지고 마는 파도처럼 늘 무언가 배우기를 시작하지만 끝맺음 없이 어느 순간 흐지부지 잊혀진다.


 파도 같은 나의 취미 생활의 시작은 요가였다. 20대 초반 운동이란 단어가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요가 학원에 등록을 했다.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며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몸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요가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운 좋게도 첫 선생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는 그런 분이었기에 잡념 없이 요가에 집중할 수 있었고,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도 누구를 만나든 나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봐 주니 요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요가에 열정을 쏟아내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갑자기 그만 두신다는 게 아닌가. 이미 선생님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터라 그 후 어떤 선생님을 만나도 마음을 정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요가 수업을 이어가지 못했고, 처음 밀려오던 파도는 그렇게 부서지고 말았다.


 요가 학원을 한참 다니던 그때, 나의 눈을 잡아 끈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은 요가 학원 근처에 있던 작은 퀼트 샵이었다. 호기심에 들어갔다 수업을 등록하고 나왔으니 시작은 참 쉬웠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과 왕초보에게 주어지는 과제 사이의 간격은 밤하늘의 저 달만큼 멀었다. 초보자에게는 천의 선택권이 없으니 주어진 조각천들은 촌스럽게만 느껴졌고,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느질 중독처럼 손을 멈추지 못하고 밤을 새우곤 했는데, 그러다 얻게 된 극심한 어깨 통증을 나는 결국 이기지 못했다. 기껏해야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기초를 쌓기도 전에 손을 놓아 버렸으니, 즐기는 경지에는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일까? 그 후로도 줄줄이 무언가를 시작은 했지만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아노는 꽤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만 보면 너무나 부러웠고, 어릴 적 피아노 숙제는 늘 학원 가기 5분 전에 재빠르게 사과를 채워 넣는 것으로 대신했던 그 시절을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 첫째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이가 피아노에 앉아 ‘작은 별’을 떠듬떠듬 치고 있었다. 덩달아 옆에 앉아 피아노를 뚱땅거리던 나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나쁘지 않은걸? 배워 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혹시 어른도 레슨 하시나요?”


 손은 내 손이 아닌 듯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악보도 겨우 읽어 가며 서툴게 건반을 찾아 누르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달팽이처럼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실력에 내심 뿌듯해하던 날들이 이어지던 중, 갑자기 코로나로 모든 것이 중단되어 버렸다. 연습을 하면 분명히 나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도움 없이는 넘기 힘든 벽이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매일을 빠짐없이 연습을 했어도 그 벽을 느낄 때마다 연습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종일 집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던 그 시기, 한가하게 흘러가던 시간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음은 지우개 도장이었다. 그렇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단순노동.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조각칼을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지우개를 파다 보면 시간은 잘 흘러갔고 어느새 예쁜 도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도장을 만들어 여기저기 찍으려면 잉크패드도 필요할 테니 색색으로 사 모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마지막 강의를 마친 후 지우개, 조각칼 그리고 알록달록 잉크패드들은 고스란히 나무 박스에 담겨 저 구석 어딘가에 쳐박히고 말았다.




“너는 차~암 뭐든 열심히 해. 오래가진 않지만...


 지우개 도장의 파도가 지나간 후 다시 몰려온 캘리그라피 파도에 헤엄치고 있을 때, 남편이 요상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던진 말이다. 캘리그라피 강의를 듣는 동안에는 외출할 때도 가방에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 놓고 알파벳을 그려 댈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집에서도 툭하면 노트를 꺼내 들고 뭔가를 하고 있으니 남편은 또 뭐를 하나 싶었나 보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뭐 해?”하고 말을 걸더니 휙하니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내던졌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한 채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는데 이런 말을 듣고도 이 수업의 마지막 과제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캘리그라피 작품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고 이제는 글쓰기다. 완강만 하면 손을 놓아버리는 몹쓸 버릇을 이제는 버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이 있다. 확고한 의지? 진득하게 이어갈 끈기?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계속 쓸 용기다. 나는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독서가도 아니고 글을 써본 경험이 많은 작가도 아니다. 그런데 이제 막 글을 쓰려 발을 들여 놓아 보니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모를 때보다 알고 나면 더 무섭다고, 브런치에 한 편의 글을 발행하고 나니 다음 글을 쓰는 것이 더 막막하고 두려워졌다. 누군가는 고작 이런 글을 쓰느라 그렇게 괴로웠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새 글 첫 문장부터 브레이크가 걸릴 정도로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짜내어도 나올 것이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함, 그래서 도저히 열 줄 조차도 못 넘길 것 같은 불안함, 부족한 어휘 탓에 적당한 단어들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실망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끝없는 퇴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력함, 이 모든 감정들을 누르고 결국에는 완성된 글에 다다를 수 있는 그 용기를 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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