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
1992년, 유럽의 낯선 도시 한가운데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길을 잃은 듯 서성이곤 했다.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 목적지까지 가는 유일한 길잡이는 손에 쥔 종이 지도뿐이었다. 길모퉁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방향을 가늠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책 한두 권과 약간의 비상식량이 있는 작은 배낭을 메고, 마음 내키는 대로 보고, 느끼고, 그리고 글로 남겼다. 그러나 때로는 방향을 잃고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종이지도를 펼쳐 동서남북을 돌려가며 나의 현재 위치를 찾으려 애쓰기도 하였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한 노천시장, 길을 물으며 나눈 짧은 대화들, 골목에서 울려 퍼지던 버스킹 연주의 선율,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했다. 그때는 몰랐다. 길을 잃는 것이 오히려 풍요로운 시간을 선사한다는 것을, 삶도, 여행도 예상치 못한 순간 속에서 더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길을 잃으면 보이는 풍경이 있고, 돌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며칠간 여행할 것인지, 몇 곳을 방문할 것인지 미리 계산하여 여분의 필름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필름 한 통에 36장의 사진이 담긴다는 사실을 알기에, 한 장 한 장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실수로라도 셔터를 누르면 돌이킬 수 없었기에, 매 순간 신중하게 화면을 구성하고, 빛과 구도를 살폈다.
사진을 찍은 후에도 긴 기다림이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야만, 그리고 현상소에 맡긴 필름이 인화되어야만 비로소 그 여행의 순간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그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사진 한 장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기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버튼 하나로 무한히 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버릴 수 있지만, 그만큼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무게도 가벼워졌다. 그때는 몰랐다. 기다림이 사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느린 속도가 오히려 순간을 더 깊이 새기게 만든다는 것을.
여행이 주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행자들을 만나면, 다른 문화 속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나 자신에 비해 더욱 성숙하고 진지한 그들이 부러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그 만남이 내 사고방식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들이 쌓이며, 내 마음도 더 유연해졌다. 그때는 몰랐다. 여행이란 단순히 다른 곳을 가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삶을 만나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내가 조금씩 변화해 간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두려움이 많았고, 조급했고, 나와 다른 삶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걸, 기다림이 때로는 더 깊은 감동을 준다는 걸, 나와 다른 이들을 만날 때 비로소 내가 넓어질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 시간들이 결국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