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가는 기차
서랍 속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니, 선명했던 얼굴이 이제는 희미해져 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지만 , 내 마음은 여전히 그날의 온기를 붙잡고 있다. 한때는 끝없이 펼쳐질 것 같던 날들이, 한순간 스쳐간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때를 그리워한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또 다른 30년이 지나가 버릴까 두려워진다.
1992년, 일 년을 재수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다른 꿈이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아 들어간 대학이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 모든 게 낯설었지만 나름 새로움을 즐겼다. 친구들과 학교 앞 낡은 술집에서 밤을 새우고 이야기를 하며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적응해 나갔다.
고등학교 2학년때로 기억한다. 아침에 학교 가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는 중에 아버지가 뉴스를 보기 위해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순간 나의 시선이 멈췄다. 아니 꽂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유럽의 어느 마을을 배낭하나 메고 여행하는 대학생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른 새벽에 부슬부슬 내리는, 사람들도 아직 다니지 않는 이른 시간에 홀로 거리를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고 나는 그때 결심했다. 나중에 대학에 가면 꼭 유럽 배낭여행을 가야겠다고.
그 기억을 떠올린 순간, 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그때부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플랜을 세웠다. 그해 여름에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줄이며 알바를 찾아다녔고 이것저것 돈이 되는 것은 웬만하면 가리지 않고 했다.
한편으로는 열심히 아르바이트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행계획들을 세우고 조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떻게 그곳을 알게 됐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세계로 가는 기차' 서클을 알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하던 배낭여행 동호회로 그 당시 신촌에 작은 공간을 빌려 유럽 배낭여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친목도 도모하는 유익한 공간이었다.
나는 신촌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당시 신촌의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가곤 했는데 그 모임을 위해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주민등록증 사본, 여권용 사진등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군대를 가기 전이라 신원보증서까지 친지 중 한 분에게 부탁하여 모든 서류준비를 마쳤다.
나는 서점으로 가서 그 당시 유일한 여행책이었던 <세계를 간다-유럽 14개국> 책을 6천 원 정도에 구입하고 첫 장부터 꼼꼼히 읽어나갔다. 그 책에는 각 도시 지도와 볼거리, 먹거리 등 많은 최신정보가 적혀 있었다. 전화기도 인터넷도 없었던 그때, 그 책은 나의 유럽 여행을 책임질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싶기도 하지만 나름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다음에 할 일은 소양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됐지만 그 당시에는 해외에 나가려면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예를 들면, 호텔에서 샤워할 때 커튼 잘 치고 해라, 카펫이 젖으면 비용을 내야 한다, 간첩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라 등등.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던 나는 웃음기 싹 빼고 집중해서 들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해 7월 '세계로 가는 기차' 회원 3명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