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⓶
그날 「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는 간략했다.
기사에는 단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주회(晝晦)’, 즉 ‘낮이 어두웠다’는 것이다. 일체 어떤 설명도 붙어 있지 않았다. 요즘 식으로 무슨 일기예보를 적어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단 두 글자가 웅변하는 그날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실록이다 보니 세조와 그 정권의 입장에서의 ‘어두움’이겠지만, 기실 사육신을 포함한 복위 운동 가담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어두움’이었다. 그날 김질과 정창손은 “비밀히 아뢸 것이 있다”며 경복궁 사정전으로 나아가 성삼문 등의 거사에 관해 세조에게 털어놨다. 성삼문이 했다고 하는 말 중에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는 말은 김질이 이날 했던 밀고 내용 속에 들어 있었다.
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조는 급히 승지들을 불렀다. 그중에는 좌부승지인 성삼문도 있었다. 결국 그 길로 성삼문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김질과의 대질 끝에 성삼문의 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육신의 이름이 나왔다.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의 이름이 나왔고, 그리고 다시 유응부와 박쟁의 이름이 나왔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성삼문은 회피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언급된 모든 사람이 붙잡혀왔다.
국문이 시작되었다.
세조는 박팽년에게 다가갔다. 한차례 곤장 세례 후 공모한 사람을 묻자, 박팽년은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 성승, 박쟁, 유응부,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와 내 아비였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세조가 다시 추궁하니,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박팽년의 이 말을 성삼문의 말로 착각하곤 한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단종 복위 운동이나 사육신의 이야기가 거론될 때면 늘 성삼문과 함께 그의 아버지인 성승의 이름이 맨 앞에 자리하곤 했다. 부자의 이름이 함께 오르내리는 건 거의 이 둘 뿐이니, 앞말을 성삼문이 했던 말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팽년의 아버지로,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 또한 단종 복위 운동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성삼문과 하위지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내놓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며, 거사를 준비할 때부터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국문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세조는 6월 6일 집현전을 없애버렸다.
6월 7일에는 결국 단종이 연루되었다.
국문을 받던 성삼문과 권자신은 상왕(단종)도 역모 사실을 알고 있으며, 거사 당일에도 권자신이 창덕궁에 나아가니 상왕이 대도자(大刀子)를 내려주었다고 했다. 권자신은 단종의 외삼촌이었다. 같은 날,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 그리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유성원과 허조(이개의 매부로, 세종 대 문신 허조와는 동명이인이다)의 시체가 거열된 후 전국 팔도에 나눠 전시되었다.
6월 8일, 백관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군기감 앞길에서 성삼문, 성승, 박중림, 이개 등 단종 복위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지처참을 당한 후 3일 동안 저자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은 이들 중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과 무인인 유응부를 일컬어 ‘사육신(死六臣)’이라는 이름으로 그 충절과 의리를 기억하였다. 나라에서 버림받은 후 큰 돌덩이를 안고 스스로 멱라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초나라 굴원처럼, 그들은 그렇게 주막 하나 없는 곳으로 갔다.
누구의 절명시인가?
앞에 소개한 절명시의 작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 시가 성삼문의 작품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한참 앞선 16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어숙권이 쓴 『패관잡기』에는 “성삼문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근거로 성삼문보다 앞 세대인 중국 명나라 초기의 인물 손궤가 지은 시를 제시했다. 손궤 또한 처형당한 인물로, 시를 지은 상황과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 손궤의 시는 이렇다.
타고성정급(鼉鼓聲正急)
서산일우사(西山日又斜)
황천무객점(黃天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북소리 급해지고
서산의 해 또한 기우네
황천에는 객점도 없다는데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어갈까나
시의 뒷부분만 보면 ‘객점(客店)’이 ‘일점(一店)’으로 바뀌었을 뿐 두 시가 동일했다.
또한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집』에도 이 절명시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사육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누군가가 손궤의 시를 차용하여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인 성삼문이 죽기 전에 읊은 시라며 그 충절을 퍼뜨렸을 수 있었다. 한번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는 세월 속에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구전되다가 이긍익이 그중 하나를 듣고 『연려실기술』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성삼문의 입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명나라를 여러 차례 다녀오고, 명의 학자들과 교류가 많았던 성삼문은 손궤의 시를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사형장으로 가면서 성삼문은 고개를 돌려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머릿속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손궤의 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의 심정을 그만큼 대변해주는 시도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 시에 빗대어 이승에서의 마지막 회한을 토해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