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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희 Jul 29. 2020

#5 이_몸이_죽어서_무엇이_될꼬_하니 ⓵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⓹

#5 이_몸이_죽어서_무엇이_될꼬_하니 ⓵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적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그가 태어난 노은리는 고려 말의 명장 최영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 성삼문의 이름과 관련한 탄생 이야기가 전해진다. 


재구성하면 이렇다. 

방에서 어머니가 한참 산통을 겪고 있을 때, 아버지 성승은 마당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난데없이 웬 소리가 들리는데, “낳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누구나 그 상황이라면 깜짝 놀랄 뿐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그러니 하늘에서 연거푸 두 번 더 “낳았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방에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성삼문이 태어난 것이다. 기이한 생각도 잠시, 방으로 뛰어들어가 아이를 본 성승은 아이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 즉 하늘로부터 “낳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어본 특별한 아이란 의미였다. 물론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내용이니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총명하고 범상치 않은 삶을 산 성삼문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탄생 설화임엔 분명했다.


엄찬 고택, 홍성 노은리, 엄찬은 성상문의 외손이다.


성삼문의 젊은 시절은 비록 탄생 설화의 기대만큼 영웅적이진 않았지만, 21살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로 발탁이 되었으니 동년배에 비해서는 특출한 삶이었다. 25살 때는 세종의 배려로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등과 함께 일종의 공부 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얻어 북한산 진관사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하위지와는 문과 합격 동기였다. 결국 이때 함께 공부했던 동료 중 신숙주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사육신의 길마저 함께 걷게 되었다.  


이들은 세종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때 정인지, 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 작성에 참여했다. 이에 앞서 세종은 성삼문과 신숙주를 요동으로 보내 그곳에 귀양 와 있는 명나라 학자 황찬으로부터 음운학 등을 배워 오게 했다. 이런 왕래는 총 13차례나 이루어졌다. 세종이 성삼문과 신숙주를 요동에 보낸 이유인즉, 이듬해에 훈민정음의 반포를 앞두고 훈민정음 창제의 제자 원리 등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훈민정음 해례본』에 녹아들어갔다. 요동에서 배운 경험은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성삼문과 신숙주는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로 성장했다.


세종, 문종, 단종을 거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한껏 기량을 뽐내던 성삼문의 좌절은 수양대군의 야심과 맞물려 있었다. 사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던 집현전이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계유정난 후 성삼문을 ‘그날 궁궐에서 숙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난공신 3등에 녹훈했던 것이다. 즉위 후에도 연이어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로 승진시켰다. 하지만 그럴수록 성삼문의 의지는 확고해져 갔다. 더구나 성삼문이 우부승지일 때 좌부승지는 한명회였고, 도승지는 신숙주였으니 당시 얼마나 성삼문의 속이 타고 열불이 났겠는가. 그런데 1455년 9월에 세조는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44명을 좌익공신에 봉할 때도 3등에 성삼문의 이름을 올렸다. 물론 단종 복위 사건으로 성삼문의 공신은 추탈당했다. 이에 반해 밀고했던 정창손은 원래 3등에서 2등으로, 김질은 새롭게 3등으로 추록되었다. 당시 공신 1등에는 7명이 뽑혔는데, 한명회와 함께 신숙주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런 상황을 보건대, 세조는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신숙주와 성삼문에게 많은 공을 들인 듯했다. 

신숙주는 명나라에 사은사로 함께 다녀오면서 이미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니, 특히 성삼문을 끌어들이려 애를 썼던 셈이다. 하지만 공신 책봉과 승진 등 그 무엇으로도 성삼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국문장에서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 보충수업 ∥


훈민정음 해례본     


1997년 유네스코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훈민정음은 『훈민정음 해례본』(이하 『해례본』)을 지칭한다.     


『해례본』은 본문인 「예의」와 해설서인 「해례」로 구분된다. 

「예의」는 창제 목적 등을 세종대왕이 직접 쓴 것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랏말싸미……’로 시작하는 글이다. 세종대왕은 창제 목적을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라고 밝혀두었다. 이는 1446년 9월 29일자 「세종실록」에 포함되어 있어서 현재까지 고스란히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해례」이다. 

「해례」는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 원리를 풀이한 훈민정음 사용설명서인데, 이 중 정인지가 쓴 <서문>만 위의 「세종실록」에 포함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알 수 없었다. 『해례본』이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해례본』이 다시 세상에 등장한 건 1940년의 어느 날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간송 전형필이 시내를 걸어가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고서적 전문가가 급히 가는 걸 보았다. 전형필은 직감적으로 뭔가 중요한 것이 있겠다 싶어서 그 사람을 쫓아갔다. 그래서 알게 된 놀라운 소식이 바로 안동에서 『해례본』 원본이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전형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이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당시 1000원이던 책값을 11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고 하니, 열한 채 값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전형필은 책값으로는 10000원을 주고, 1000원은 수고비 명목으로 줬다고 한다. 이는 책의 값어치에 합당한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이자, 그처럼 귀중한 문화유산을 잘 보관해온 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 후일담도 전해진다. 

당시 전형필은 국보급에 해당하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육이오가 일어났다. 그러자 전형필은 그 많은 보물 중 『해례본』만 챙겨서 피란길을 떠났다. 어수선한 난리 통에서도 잠잘 때면 『해례본』을 자신의 베개 속에 넣고 잤다고 한다. 그만큼 그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을 적시해 두었는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강희안, 이개, 이선로, 이렇게 8명이었다. 또한 훈민정음은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서문>에서 정인지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여담이지만 요즘 한국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들의 한국어 실력을 보고 있자니, 여기에 이 말을 추가해도 될 것 같다. “외국인도 한 달 만에 배울 수 있다!”     


그런데 2008년 또 하나의 『해례본』이 상주에서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소유권 다툼으로 법정 싸움까지 가고,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화재로 『해례본』이 훼손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 많은 이의 안타까움을 낳았다. 어쩌면 문화유산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복이라면, 전형필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복 중에도 아주 큰 복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상주의 『해례본』 또한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잘 보존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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