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봉희 Jul 18. 2020

#4 인재들의_전성시대

(성삼문)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⓸

#4 인재들의_전성시대     


조선시대에 그 많은 사화와 당쟁을 통해 무수한 목숨이 죽임을 당했지만, 사람들이 가장 안타깝게 여기면서, 때론 분노를 자아내는 죽음 중 하나가 바로 사육신의 죽음이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이들의 죽음은 연쇄 작용을 일으켜 어린 단종의 죽음을 불러왔고, 세조와 달리 조카의 왕위를 되찾아주려 했던 금성대군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짐으로써 그 애처로운 감정을 증폭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 시대와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집현전 젊은 학사들의 총명하고 재기발랄한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거기에다 고문 과정에서 보여준 사육신의 기개, 그리고 엇갈린 운명을 선택한 성삼문과 신숙주의 우정과 배신의 스토리도 한몫했다.


오백 년 조선의 역사에서 흔히 ‘인재들의 전성시대’로 인정받는 시대가 있다.

훌륭한 인재가 두루 배출되어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중대사에 혁혁한 족적을 많이 남긴 시대가 거기에 해당했다. 어느 시대건 특출한 인물 한두 명 없는 시대는 없겠지만, 그중 대개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시대로는 선조 연간과 정조 연간이 이에 해당했다. 선조 연간은 이황, 이이, 조식, 이순신, 류성룡,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허균, 허준, 정철, 정인홍, 곽재우, 이지함, 한석봉 등 요즘 사람들에게 이름만 대도 알 만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거 포진한 시대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우리나라 화폐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시대이기도 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별도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렀다.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영역에 있는 선조의 능역을 말하는데, 선조와 두 왕비(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이 함께 있다. 선조 연간에 그만큼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음을 빗댄 말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듯이 정조 연간에도 많은 인재들이 등장한 시대였다. 

성호 이익의 제자들로 남인 계열의 중농주의 학파(성호학파)를 이룬 채제공, 안정복, 권철신, 정약용뿐만 아니라, 홍대용을 필두로 한 중상주의 학파(북학파)의 구성원인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이서구 등이 실학에 기반한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서명선, 이승훈, 이가환, 김홍도, 정약전 등이 활동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재들의 전성시대가 있으니, 바로 세종 연간이었다. 

물론 세종 스스로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우뚝할 만한 인재로 꼽히지만, 세종 외에도 황희, 맹사성, 김종서, 이종무, 최윤덕, 정인지, 장영실, 이순지, 박연, 정초 등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사육신을 포함한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활약하던 시대였다.

특히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는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뛰어난 학식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한글 창제뿐 아니라 세종이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만약 세조의 왕위 찬탈이 없었으면, 이들은 안정기로 접어든 새 왕조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들의 죽음은 실질적으로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상당한 손실인 셈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 길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성삼문은 세종이 즉위한 해인 1418년에 태어났다. 

박팽년과 신숙주는 성삼문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났다. 세종의 치세와 함께 삶을 시작한 이들은 젊은 엘리트들이 모이는 집현전에서 만났다. 당시 집현전은 열정적인 임금과 젊은 인재들이 밤낮없이 연구하고 토론하던 공간이었다. 요즘의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면 엄청난 초과 근로와 과중한 업무 강도가 일상처럼 행해진 셈이었다. 『용재총화』에는 세종과 신숙주의 일화가 전해진다. 숙직을 하던 신숙주가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자, 세종이 자신의 옷을 벗어 어깨에 덮어줬다는 이야기다. 이날의 일화는 사실인 듯하다. 신숙주의 묘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신숙주가 사경(새벽 1시~3시)까지 자지 않고 공부하고 있자 세종이 어의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살 터울의 우정도, 그리고 고락을 함께 했던 동지애도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그 운명이 갈라졌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변함없는 충과 의로써 세종이 부탁한 단종을 지키려다 한창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신숙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사육신 공원, 성삼문 묘


신숙주는 세조(수양대군)와 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렇다면 세조와 신숙주는 언제부터 같은 길을 꿈꾸었을까? 둘이 가까워진 계기는 집현전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아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했다. 젊은 혈기에 학구열까지 높았던 이들은 함께 토론하고 책을 만들었다.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동갑내기였다. 그러니 이때 신숙주와 수양대군이 자연스레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 드러난 결정적인 순간은 수양대군의 선택에 의해서였다. 


때는 1452년 9월 10일이었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그날 조정에서는 고명(誥命, 중국 황제가 보내준 임명장) 사은사로 누구를 보낼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즉 명 황제가 단종을 임금으로 승인해준 것에 대한 답방 책임자를 정하는 문제였다. 원래 고명 사은사는 으레 삼공(三公)이 가는 것이 관례였고, 이때는 김종서가 갈 차례였다. 그러나 김종서는 “내가 오랫동안 변장(邊將)으로 있어서 야인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는데, 만약 불의의 변이 있으면 국가에 걱정을 끼칠까 두렵다”는 핑계를 대며 가기를 꺼려했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수양대군은 “주상께서 나이가 어리고 정부의 대신은 조정 정사를 도모하고 의논하는데, 우리들(종친)은 일하는 것이 없으니” 자신이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이를 안 안평대군의 측근인 이현로가 “공의 용모와 수염과 시문과 서화에다 우리들이 배종하고 북경에 가면 가히 해내에 명예를 날릴 것이며, 널리 인망을 거두어 후일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하자, 안평대군은 자신이 갈 수 있도록 해달라며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의지가 너무도 완강했다. 결국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떠나게 되었다.   


물론 실록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특히 세조 대에 편찬된 「단종실록(당시는 노산군일기)」에서 세조와 관련된 부분은 각색의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하튼 이때 수양대군은 집현전 직제학이던 신숙주를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삼았다. 사실 수양대군은 한 달 전에 이미 신숙주의 마음을 떠본 적이 있었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정수충이란 자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신숙주가 그 문 앞을 지나갔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신 수찬!”하며 불렀다. 신숙주가 말에서 내리자, 수양대군이 웃으며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 문 앞을 지나면서 들어오지 않는 것) 하는가?”라고 묻고는 집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함께 술을 마시다 수양대군은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 보지 않는가?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였네. 사람이 비록 죽지 않을지라도 사직에는 죽을 일이다”며 농담을 건넸다. 옛 친구 운운하는 건 집현전 시절의 인연을 말한 것이다. 그러자 신숙주는 “장부가 편안히 아녀자의 수중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 집에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라고 할 만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수양대군은 신숙주에게 그렇다면 중국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사은사 일행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아들도 끼어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자신이 북경에 가 있는 동안 변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다녀오는 동안 염려했던 일은 터지지 않았다. 이쯤에서 사은사와 관련하여 그 이후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넘어가자. 사육신 중 세 명이나 연관되어 있는 일화였다. 이야기는 이렇다.      


단종 1년(1453)의 일이었다. 

문종이 지은 책인 『병요(兵要)』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두 가자(加資, 품계를 올려 주던 일)하도록 명을 하자, 하위지는 자신은 상을 받을 만한 공이 없다며 명을 거두라고 청했다. 이유인즉, 자신이 편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집현전은 본래 책을 만드는 곳이고, 책을 자세히 살펴 읽는 것이 그 직분인데, 주어진 일을 했다고 해서 추가로 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사안에 대해 성삼문도 자신에게 한 자급을 더하여 준 일은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내용인즉, 『병요』는 세종조에 완성되었고, 선왕에 이르러서 또 첨삭을 더하였는데, 당시에 교정하는 일은 수양대군이 총책임자였고, 네댓 명의 문사가 좌우에서 도왔지만, 자신은 이때에 다른 곳에 출장을 다니기도 했고,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있기도 했으며, 비록 간간히 참여하기는 했지만 역시 일을 책임지고 맡지는 않았을 뿐더러, 시문을 짓는 일로 직업을 삼아 날마다 대궐 안에 있으면서 취하고 배불리 먹어 안락함을 즐겼는데, 그렇듯 직업의 일로 잠시 수고한 걸 가지고 또 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위지는 사직을 청했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하위지나 성삼문 모두 참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오래전 전임 사장의 공적에 참여한 일로 승진을 시켜주겠다는데, 자신은 직무에 포함된 일을 당연히 했을 뿐이고 그때의 공적에 대해서는 이미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또 받을 수는 없다면서, 만약 철회하지 않으면 퇴직도 불사하겠다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이때 승진 대상자는 『병요』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수양대군이 1452년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올 때 수종한 사람들도 명단에 함께 올랐었다. 즉 『병요』의 편찬과 사은사 모두 수양대군과 관련된 일이며, 이 일은 요청한 사람 또한 수양대군이었다. 결국 이때의 해프닝은 1453년 5월 25일, 가자했던 걸 모두 철회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이날의 철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또 다른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었다. 당시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 유성원이 간언을 끝까지 계속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후일담도 전한다. 명단에는 사은사 일행으로 참여했던 김종서와 황보인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성원의 간언으로 철회되자 김종서는 “철회하는 건 섣부른 결정 같다”고 했으며, 황보인은 특히 유성원의 아버지까지 언급하며 유성원을 싫어하는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