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3일 화요일 날씨 맑음
한번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자꾸만 짜증을 내게 되고,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짜증이 났다. 그런데 오늘은 학교에서 만난 한국인 엄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에 가기로 약속한 날. 새로운 인연과의 첫 번째 약속이고, 아이들도 무척 기대하고 있는 터라 취소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자주 가는 쇼핑몰 1층 로비에 에어바운스로 만든 놀이공간이 있다. 키즈카페라기에는 다소 허접해 보이지만 입구에 지키는 사람이 있는 걸로 봐서 유료로 운영되는 곳인 것 같았다. 아이들은 쇼핑몰에 갈 때마다 저기 가서 놀고 싶다며 애원했지만 다음에 가자는 기약 없는 말로 미루기를 반복했다. 괜히 관리도 안 되는 곳에 가서 전염병이라도 옮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키즈카페는 이용 시간에 따라 요금이 다르고 보호자 요금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결제가 어려워서 흔쾌히 데리고 가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든든한 지원군이 생기니 상황이 달라졌다. 만에 하나 아픈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있고, 키즈카페의 어려운 결제를 도와줄 나의 ‘한국인 친구’가 동행하기 때문에 오늘은 두려울 게 없었다.
약속 장소는 시티 온 1층에 있는 키즈카페. 쇼핑몰 규모가 커서 그런지 로비에 있는 것이라도 (우리가 많이 봤던) 에어바운스처럼 허접하지 않고 나름 그럴싸했다. 입구에 결제에 대한 안내문이 있었지만 까막눈이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던 나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의 키즈카페는 우리나라처럼 시간 단위로 계산하지 않고, 한 번 결제하면 하루종일도 놀 수 있다고 했다. 입장할 때 종이 팔찌를 채워주는데, 그 팔찌만 있으면 퇴장 후 재입장도 가능하단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1회권은 80위안(대략 16,000원)이고, 6회권을 결제하면 1인당 43위안이다. 마침 오늘 함께 한 아이들의 숫자가 딱 여섯 명이라 6회권을 결제해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럭키!
아이들은 신나게 키즈카페로 들어가고, 나의 정저우 생활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학교 교장 선생님의 아내와 아이들이 키즈카페에 왔다. 방금 전까지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그녀가 이번에는 미국 여인의 지원군으로 나서 티켓 발권을 도와주었다. 중국어에 이어 영어에도 능한 그녀의 빛나는 재능이 부러웠다. 내 한국인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쩌다 보니 교장 선생님의 아내와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아는데 모르는 채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용기를 내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모르는 동양 여자의 인사에 ‘너 누군데?’ 하지 않고 맑게 인사를 받아준 그녀의 태도에 힘을 입어 내 소개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화 초반에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부끄럽게 고백했을 때, 그녀에겐 내 영어가 좋게 들리니 괜찮다. 게다 본인의 중국어와 한국어 실력에 비하면 내 영어 실력이 훨씬 좋으니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이야기해 줘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자신감이 불끈 생겼다.
우리 둘 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해외 살이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하다 보니 고작 2주 살아놓고, 영어도 짧은 주제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마음이 급해 개떡같이 몇 마디 던져놓아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예쁜 문장으로 답해주는 그녀와의 대화가 무척 신기했다. 내 평생 외국인과 단둘이 이렇게 긴(?)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처음이라 기분이 마냥 둥실거렸다.
분명 외출하기 전에는 마음이 바닥에 붙어있는 기분이었는데, 집에 돌아왔을 땐 마음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한국인 친구와 나눈 대화 속에서, 내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그게 더없이 귀하고 감사했다. 한편 미국인 친구(?)와 함께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보낸 시간 속에서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어, 앞으로 조금 더 용기를 내 볼 수 있을 것 같단 희망을 품게 됐다.
정저우에 와서 2주를 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훗날 돌아보며 ‘맞아, 그때 그랬지’ 하며 추억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묘한 데서 재미가 붙었다. 일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지인들의 다정한 인사를 들을 때마다,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더 재미있게 더 잘 쓰고 싶단 욕심이 생겼다. 또, 내 일기가 중국 이주를 계획 중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정보가 될 만한 부분은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썼다.
꾸준히 하는 걸 가장 못하는 내가, 감히 일기 쓰기에 도전하다니. 참 겁도 없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 보고 싶단 꿈을, 아니 욕심을 부리고 싶다. 내일부터 개학이라 이제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내던져질 텐데,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재미를 찾아보려고 갖은 애를 쓸 텐데, 나만 살던 대로 편하게 산다면 아이들이 좀 배신감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 역시 욕심을 부려 전과는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자려고 누워있던 둘째가 물었다. “엄마, 친구들이 뭐라고 할 때 모르겠으면 ‘워 슐 한궈런’이라고 하면 돼?” 하루종일 신나게 놀다가 내일 유치원 가서 낯선 친구들 만날 생각을 하니 떨리는 모양이다. 이 작은 다섯 살 아이도 개학을 앞두고 최대치의 용기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기특하고 찡한 마음.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내일부터 진짜 시작. 우리 넷, 정말 정말 짜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