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가 나를 소처럼 몰았지
푸르스름한 빛이 서린 새벽녘, 조용한 낯선 거리가 무서워
호스텔 문 앞에 바짝 붙어서는 Laguna 69 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Laguna 69는 와라즈에서 차를 타고 꽤 이동해야 하는 거리고, 하이킹도 5시간 정도 소요되어서
새벽 5시에 호스텔 앞으로 태우러 가겠다며 여행사 사장님이 말했다.
'새벽 5시'에 과연 내가 일어날 수 있을까 했지만 한국은 아침 9시,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던 터라 어렵지 않게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북한산도 한 번 안 가던 내가, 지구 반대편 머나먼 땅에서 뭐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쯤 거대한 관광버스가 도착했다.
어제와 같은 삼삼오오 타는 미니밴을 예상했는데 Laguna 69는 스케일이 달랐다.
45인승 좌석은 반 정도 채워져 있었다. 나를 태운 버스는 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하게 돌면서 한 호스텔에 멈춰 나와 같은 여행객을 태우고 넓은 도로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창 밖 세상이 환하게 보일 때 즈음, 버스가 멈춰 섰다.
선글라스를 쓴 등산복을 입은 가이드가 손을 힘차게 흔들며 버스에서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버스 안에서 선글라스를 끼면 앞이 잘 보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사람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눈앞에는 백설공주가 계모에게 쫓겨나 산속을 거닐다 발견한 일곱 난쟁이들의 집 같은, 식당이 있었다.
여기서 아침을 먹고 출발할 거라고 선글라스를 쓴 가이드가 말했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는 메뉴판을 보는데 3 솔짜리 아보카도 샌드위치가 있다.
무료 천원도 안 되는 가격이라니,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커피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커피도 3 솔, 천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앞으로 천 원으로 아보카도와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너무 행복해졌다.
행복감을 한가득 안고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
한참을 달리고 꼬불꼬불한 산 길을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더니 드디어 멈추어 섰다.
자동차 하나도 지나가기 어려워 보이는 좁은 산 길을 대형 관광버스로 무사히 완주하다니, 운전기사님에게 '생명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푯말은 해발 4천 미터,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며 2시간 뒤에 정상에 도착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Vamos!'를 외쳤다. -갑시다! 같은 느낌으로 비장함이 좀 섞여 있었달까. 그때까지는 몰랐다, 왜 그렇게 가이드가 비장했었는지....
본 적 없는 자연의 웅장함에 신이 나 연신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흡사 반지의 제왕 세트장에 있는 것 같이, 거대한 푸르름과 여기저기에 있는 폭포들이 내 발길을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 들게 했다.
멈추어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가이드는 나를 귀신같이 찾아내 'Vamos!'를 외쳤다.
그렇다, 2시간 내에 정상에 도착하려면 쉬지 않고 걸었어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 멋있다며 감탄했던 산봉우리들은 내가 정복해야 하는 곳들이었다. 오르고 오르다 힘들어 주저앉으면 선글라스 가이드가 귀신같이 나를 찾아와 'Vamos!'를 외쳤다.
가이드는 나를 소처럼 몰았고 정작 소들은 초원에서 유유자적하게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소똥 밭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분명 45인승 관광버스를 타고 왔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가 말한 2시간은 다 되어가고 아직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신발은 이미 소똥 범벅이고 다리는 후들후들거렸다. 눈앞의 언덕을 겨우 오르면서 하이킹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땅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페루비안이 나에게 손을 흔든다.
45인승 버스에서 봤던 친구였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핑크색 목티와 스키니진을 입은 모습에 '한 껏 멋을 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분명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같은 저질체력에 무리에서 뒤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점점 가까워지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나에게 '너도 힘들지? 나도 힘들어. 우리 같이 힘 내보자.'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 우리 함께 정상까지 힘내자.'라는 답신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렇게 동지를 얹고는 서로를 격려하며 정상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우리를 빼고 모든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북적북적한 정상에는 찐한 하늘색의 69 호수와 그 호수로 떨어지는 폭포들이 거대한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하늘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호수의 색감에 넋을 놓고 있는데 나의 동지, 페루 친구가 내 손을 잡고는 호수로 들어가자고 한다. 이 친구를 보니 이미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렸고 이 친구의 친구들-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던-은 사진을 찍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호수 입구의 작은 돌에 앉아 사진을 찍자는 건데 '나는 괜찮아'라는 제스처로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손을 흔들었지만, 어느새 바위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다시 선글라스 가이드가 'Vamos!'를 외쳤다.
나는 정상에 도착한 지 1 5분도채 안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1시간을 머무른 거다.
떠나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늦게 도착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그 사람에 달린다.
호수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짧지만 내가 충분히 즐겼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쉬움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으니깐,
그래도 올라올 때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 길을 나섰다.
선글라스 가이드는 페루 친구와 나를 집중 관리 대상으로 선정했는지 우리 뒤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며 소처럼 우리를 몰았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소풍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잠들었고 목적을 달성한 버스는 저녁이 되어 캄캄해진 와라즈에 도착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소중한 운동화는 진흙과 소똥이 어우러져,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색감의 호수도 원 없이 보고 Laguna 69 보기 위해 가는 풍경이 너무 좋았던 트레킹,
하지만 두 번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