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이라는 이기주의

by 이지영

화성에서 온 시어머니, 금성에서 온 며느리

나라는 사람을 0도라고 한다면, 아마도 내 시어머니는 180도를 가리킬 것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기 어려울 만큼, 우리는 참 많이 다르다. 그 다름은 처음에는 불편함을 넘어 큰 괴리감으로 다가왔지만, 이제는 그 차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기게 했다.


시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평생을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오며,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했던 시간을 견뎌오신 분이다. 반면 나는 교육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운 세대이고, 도시에서 선택하고 계획하며 살아왔다. 삶을 바라보는 출발선부터 서로 다른 셈이다.


자라온 환경만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격과 기질 또한 사뭇 다르다. 결혼 초, 시댁 식구들과 부딪치며 나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나와 내가 자라온 가족, 그리고 시댁 식구들의 말투와 행동, 가치관은 너무도 달랐다. 나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고, 솔직히 말하면 그 이질감은 오랫동안 나를 긴장하게 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지구인과 외계인이 한 식탁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일’이다.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에너지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반면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은 내가 보기에는 일을 벌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몸이 멀쩡한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믿으신다. 아마 시어머니 눈에는 내가 꽤나 게으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왜 저렇게까지 애써 일을 만들어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결혼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어머니에게 느끼는 낯섦은 많이 옅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이해하고 포용하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판단보다는 관찰에 가까워졌다. 시어머니를 통해 사람들이 흔히 아름답게만 이야기하는 ‘모성’이 지닌 모순과 한계도 보게 되었다. 동시에 해마다 나이 들어가는 시어머니를 보며, 부모라는 껍질은 벗겨둔 채 그저 평범한 한 노인의 삶을 마주하고 있다. 그 안에서 노년의 삶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인지도 배운다.


내가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에서는 비슷한 말을 한다.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 계신 게 어디냐. 돌아가시면 후회하니 살아 계실 때 잘해라.”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시어머니가 우리 곁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은 분명히 있다. 다만 한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살아 있음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난이 아니라 기록이다. 시어머니의 모성이 지닌 모순과 어리석음, 그리고 때로는 의도와 달리 낳은 역효과를 남겨두고 싶어서다. 그것이 나에게는 반면교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아흔을 넘긴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완성하고 싶은, 나만의 작은 평전이다. 동시에 예외 없이 노인이 되어갈 나 자신에게 보내는 조용한 경고이기도 하다. 나는 다짐한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록되는 부모나 시어머니, 노인이 되지는 않겠다고. 이 글은 그 다짐을 증명하는 흔적으로, 아마도 내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화성에서 온 시어머니 / 금성에서 온 며느리

화성에서 온 시어머니 / 금성에서 온 며느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