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족적 희생이 만드는 관계의 불협화음
울 시어머니의 90년 인생은 “내 모든 순간은 새끼들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한 줄로 요약된다. 비록 나는 20여 년만 보아왔지만, 직접 보지 않았던 시간까지도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눈에 선하다. 시어머니에게 인생의 목표이자 삶의 존재 가치는 가족, 새끼들에게 하나라도 더 내어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마 그 모습을 모성의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부를 것이다.
겉모습만 본다면 희생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병원비와 약값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식구들을 위해 쓰인다. 함께 있을 때 시어머니의 머릿속은 늘 삼시 세끼,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 먹일까로 가득 차 있다.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는 시간에도 몸은 그들에게 줄 것들을 심고 키우고, 머릿속에서는 자손들의 안부와 미래를 걱정한다. TV 인생극장에 가끔 나오는, 시골에서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바로 내 시어머니이다.
그런데 나는 이 희생이 때로는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몸과 마음과 돈을 쓴다고 해서 모두 희생은 아니다. 희생이란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이다. 누군가 말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시어머니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 과연 희생일까.
시댁에 가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짓는다. 시골에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농사짓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시어머니는 평생의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새 밥을 지어 새끼들을 먹이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게 해야 엄마 노릇을 한 것이고, 그래야 스스로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도시 사람이고 아침밥보다는 아침잠이 더 좋다. 사실 평소에는 아침을 먹지도 않는다. 모처럼 쉬는 날, 당신의 아들 또한 늦잠을 원한다. 그냥 자게 내버려 두고 원할 때 일어나게 해 준다면, 나는 시어머니를 정말 멋지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우리의 바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한다.
시골집 주변의 텃밭을 가꾸는 일 또한 시어머니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평소 먹을 채소를 기르고 김장을 대비해 무와 배추를 키운다. 문제는 어머니가 허리가 굽은 아흔이 넘은 노인이라는 점이다. 소일거리라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고, 자칫 넘어져 골절이라도 생기면 큰일이 날 수 있는 상황이다. 가끔 어머니는 일을 하다 넘어져 멍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들·며느리 입장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다.
몸이 늘 아프다며 파스로 몸을 도배하고 진통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는 날도 많은데, 왜 굳이 일을 벌이고 몸을 위험하게 쓰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몸을 움직여 새끼들에게 보내줄 것들을 생산하는 것을 모성애라고 여긴다면, 노인이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다시 생각해 볼 지점이 많다. 자식들이 바라는 것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다. 한 보따리의 푸성귀가 아니라
이러니 시어머니 댁을 방문할 때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다툼을 벌인다. 아픈 엄마가 안쓰러워 제발 일 벌이지 말고 쉬라는 아들은 속상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런 아들의 태도에 어머니는 또 서운해한다.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몰라준다는 마음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 편을 들 수가 없다.
나는 어머니가 새끼들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행동들 속에 어머니 자신의 만족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땅을 놀리면 죄라고 생각하는 시골 노인의 평생 습관을 ‘자식들을 위한 일’이라는 가장 적절한 명분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TV에서 허리가 굽은 시골 할머니가 밭에서 자식들 주겠다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측은지심과 함께 모성의 위대함,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혼 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시어머니를 만나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상해할 자식들이 먼저 떠오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고, 자식들 또한 원하지 않는 일을 계속하는 모성이 얼마나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지 느낀다.
몸을 가만히 두는 순간에도 시어머니는 자식 걱정, 손자 손녀 걱정을 한다. 엄마이니까, 할머니이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때로는 없는 걱정까지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것일까. 아직 나는 그런 나이가 아니라서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사업가로 잘 살아가고 있는 아들을 두고도, 옆집 공무원 아들처럼 연금이 없다고 아들의 노후를 걱정한다. 이런 걱정이 과연 모두에게 필요한 것인지, 나로서는 쉽게 공감되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한 번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자식들에게 물 한 잔도 다 갖다 주고,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게 키웠다고. 엄마로서 할 수 있는 희생을 다 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희생에 대해 감사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마음에 쉽게 와닿지 않는다. 손과 발이 멀쩡한 아이들에게 왜 물 한 잔까지 갖다 줘야 할까. 목마르면 스스로 가져다 마시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자란 아이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크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식이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 모성이라면, 나는 그런 모성을 할 생각도, 할 자신도 없다. 오히려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시어머니는 지금까지 자신이 희생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인생에 대해 당당할 것이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이 작은 몸과 마음을 온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새끼들을 위해 써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자신 한 몸을 자식들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사실을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자식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모성을 발휘하고 희생해야만 했을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그래서 시어머니를 향한 나의 감정은 답답함과 측은지심 사이를 오간다. 자신의 희생이 자식들로부터 온전히 진심 어린 마음으로 보상받았다고, 가족에게 사랑받은 삶이었다고 느끼며 시어머니가 생을 마무리하셨으면 좋겠다고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시어머니의 잘못된 모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식들의 끝없는 이기심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