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로 포장된 강요는 관계를 마모시킨다
모성이라는 이기주의 연재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한 뒤 나는 시댁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다름 아니라 시어머니가 싸 주시는 먹거리를 거절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혼자 사시는 시어머니 댁에는 냉장고가 모두 네 대나 있다. 양문형 냉장고 하나, 양문형 김치냉장고 하나, 뚜껑식 김치냉장고 하나, 그리고 작은 2도어 냉장고 하나다. 혼자 사는 노인의 집에 이 많은 냉장고가 왜 필요할까. 그 용도를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하다. 모두 자식들에게 싸 줄 음식들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다.
시골에서 나는 각종 나물은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으니 삶아서 냉동해 둔다. 밭에서 수확한 상추, 호박, 가지, 고추도 보관해야 한다. 자식들이 사다 주는 먹거리 역시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하니 다시 나눠 준다. 이웃들이 건네는 채소와 음식도 적지 않은 양이다. 여기에 더해 시어머니에게는 해마다 반복되는 일종의 ‘연중 의식’이 있다. 봄에는 감자, 여름에는 옥수수, 가을에는 고구마, 겨울에는 배즙,귤을 준비해 자식들에게 나눠 주신다.
처음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가 싸 주시는 양을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둘이 사는 데다 맞벌이로 집에서 밥을 챙겨 먹기도 쉽지 않은데, 상추는 마치 장사를 해도 될 만큼 주시고, 호박이나 가지는 말 그대로 한 보따리였다. 감자나 고구마도 한 박스로는 끝나지 않는다. 기본이 두세 박스다.
예전 같으면 먹을 것도 귀했고 식구도 많았으니 감자나 고구마 한두 박스쯤은 금세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집은 다르다. 나는 간식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먹는 일에 크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세 식구가 감자 한 박스를 싹이 트기 전에 다 먹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옥수수를 쉰 개씩 보내주시면 남은 것들을 이미 가득 찬 냉동실에 넣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나에게 시어머니가 싸 주시는 먹거리는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관리해야 할 일, 부담스러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시댁에서 돌아온 뒤 냉장고에 이것저것을 넣다 보면, 혹은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보따리를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먹거리들이 공산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리 냉장고에 넣어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거나 상해 버린다. 우리 식구가 다 먹지 못할 만큼의 양을 받다 보니, 결국 버려야 하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시어머님이 정성 들여 키우고 준비한 채소가 상해 버려지는 모습을 보는 일은 마음이 편치 않다. 남편 역시 자기 엄마가 힘들게 마련한 것들이 버려지는 것을 보면 당연히 속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미리 먹지 않았느냐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그 말은 고스란히 나를 향한다.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거절하기 어려워 가져온 음식들 때문에 잔소리를 듣는 상황이 반복되면 나 역시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쌓인다. 이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적도 적지 않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어머니께 필요 없으니 가져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받는 사람이 필요 없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반응은 달랐다. “주는 건데 왜 안 가져가느냐”, “엄마가 살아 있으니까 이런 것도 주는 거다” 라는 말과 함께 서운함을 드러내셨다. 그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없는 거를 달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굳이 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이렇게 거부감을 가지고 싫어 하는 모습을 보면 상대의 마음을 묻지 않은 채 이어지는 호의가 과연 배려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많으면 나눠 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내 라이프스타일은 이웃과 잦은 교류를 하는 편이 아니다. 설령 나눌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을 다른 이에게 건네는 일이 과연 좋은 일인지 선뜻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시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 가운데 김장을 빼놓을 수 없다. 결혼한 뒤 나는 김치를 한 번도 담가 본 적이 없다. 김장김치뿐 아니라 총각김치, 열무김치, 물김치까지 모두 시댁에서 해결되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연세가 드신 뒤에는 성향이 비슷한 형님(남편의 누나)이 어머니의 뜻에 따라 김치를 담가 주신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다만 그 감사함이 냉장고 용량을 훌쩍 넘어선다는 게 문제다.
예전에는 겨울 내내 먹을 것이 김치뿐이었고 식구도 많았으니 많은 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찬이 김치만 있는 시대도 아니고, 식구 수도 줄었다. 그럼에도 우리집 김장의 규모는 줄지 않는다. 덕분에 내 동생들은 김장을 하지 않는다. 내가 나눠 주는 김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눠 주고도 나는 그해 담근 김치가 다음 김장 때까지 적지 않은 양이 항상 남아 있다. 해마다 나에게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의 되어 있었다.
해마다 양을 조금만 줄이자고 말해 보지만, 시어머니의 머릿속에는 나눠 줄 사람들의 목록이 이미 가득하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를 보시고 더 큰 것으로 바꾸라고 권하실 정도다. 이제는 직접 김장을 하실 체력이 되지 않는데도, 자식들이 대신 담그는 김치의 양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김장철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이 많은 김장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알면서도 또 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그래, 김장에 나를 조금씩 갈아 넣어 주변 사람들이 김치를 먹고 겨울을 나게 하는 일종의 선행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해마다 김장을 한다.
결혼 후 시간이 흐르면서, 시어머니가 무엇이든 많이 하고 많이 주는 이유가 그분의 인생 자체이자 삶의 의미라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시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이고,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웬만하면 다 받아 오자고 마음먹기도 했다. 마음은 화 내지 말고 가져오자 인데 막상 내 눈앞에서 짐 보따리를 보면 그전 결심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필요없으니 안 가져가겠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한다. 아무래도 나는 효부가 되기는 글렀고 나를 내려놓을 정도로 시어머니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어머니를 통해 내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선의라는 이름의 행동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거기에 나의 금전적, 육체적 희생까지 덧붙인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불필요할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망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라 해도, 상대의 상황과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서로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쉽지만 실천하기 힘든 그 사실을 시댁에 갈 때마다 나는 절감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우리 시댁은 주기는커녕 받아갈 생각만 한다. 뭐라도 주는 시댁을 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복에 겨운 소리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무것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빼앗기는 상황에 비하면, 무엇이든 받는 쪽이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니까.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때로는 마음의 결이 어긋나면서 서운함이나 원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주는 사람 역시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기에, 그 결과가 부담으로 돌아올 때 더 혼란스러울 수 있다. 결혼 후 나는 주는 일이란,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자리까지 한 번 더 헤아려야 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는 사람에게는 사랑이고 삶의 방식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해야 할 몫이자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어쩌면 완벽한 해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의 마음이 어긋나지 않도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건네는 것 앞에 한 번쯤은 “당신은 괜찮은지?”를 묻는 일, 그리고 그 대답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냉장고를 더 늘리는 대신, 그 질문 하나쯤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또 한 해의 김장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소란이 일지만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