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07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소설교육론 시간이다. 이 수업의 분위기는 항상 이렇다.
두 발표자의 글을 신랄하게 밟아주는 시간.
심지어 발표자는 발표 당일 과제물을 확인한 교수님이 정한다. 말 그대로 랜덤이다. 뜬금없어 보이는(학생들에게는) 두 편의 소설을 읽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는 글을 쓴다. 일주일에 한편씩이다. 과제를 제출하면 교수님의 속독으로 발표자가 둘 정해진다. 발표가 끝나면 까내리기가 목표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학생들의 악의 섞인 질문이 차라리 낫다. 질문자가 없으면 교수님이 훅 치고 들어온다. 눈물이 쏙 빠질만한 질문들이다. 질문에 답이 성에 차지 않으면,
“자네는 그 정도 탐구도 없이 이 작품을 그렇게 막, 평가하는 건가?”
하는 매질 같은 타박이 돌아온다. 모멸감, 창피함으로 얼굴 벌게지기는 예삿일. 울음이 터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발표자로 지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학생들 사이에서 꽤 자주 발표를 했으나 울며 뛰쳐나가지 않은 사람은 몇 안된다. 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가 나였다.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그것 보다 더한 타박을 견뎌냈으니까.
아래 턱이 약간 앞으로 나온,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선생님이 긴머리를 휘날리며 낭창낭창 교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친했던 친구들 중 혼자만 톡 떨어진 낯선 학교에서 요리조리 눈 굴리며 분위기 파악하고 있을 3월이었다. 우리반 문을 열기에 얼른 뒷문으로 쫓아 들어갔다.
“이 때까지 살면서, OOO 백일장에서 상 받아 본 적 있는 사람?”
다짜고짜 묻는 말에 소란스럽던 교실은 잠잠해졌고, 낯선 침입자를 수십개의 눈동자가 의아하게 바라 보았다.
“안 잡아 먹어. 없어? 그럼 글쓰기로 한 번이라도 상 받아 본 적 있는 사람?”
뭔가 새로운 일이 펼쳐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손을 안 들어도 그만이지만, 손을 들면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로 딸려 갈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두근했다. 조심스레 귀 옆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어, 너. 이름이?”
“김지야입니다.”
“으응, 나중에 따로 부를 테니까 부르면 재깍 뛰어와.”
나의 가슴 두근거림에 상관 없이 허무하게 선생님은 퇴장해버렸다. 안면 튼 친구 중 하나가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길랄라 눈에 들어서 좋을거 없는데.”
정신세계 독특하기로 소문난 2학년 문학교사라 했다. 아이들 잡는 솜씨가 보통은 넘는다고 몰랐냐고 되묻는 말에 ‘응.’이라고 할 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음날 불려 간 자리엔 스무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모두 일학년. 남학생 예닐곱명, 나머지는여학생이었다.
“소개는 할 것 없고, 일단 얼마나 쓰는지 글 좀 보자.”
다짜고짜 글을 보자는 선생님의 말에 웅성웅성.
“자 이쪽은 시, 저쪽은 산문.”
둘로 나뉜 학생들 앞에서 교탁에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을 하더니
“'소녀가 달린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이쪽은 시 한 편, 저쪽은 원고지 7장 분량의 산문 써오기.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여기서 모인다.”
문장인데 시를 쓰라니, 저게 무슨 소린가 다시 웅성거리는 속에
“시는 명사형으로 바꿔도 됨. 뭐 달리는 소녀, 소녀의 달리기. 이런식으로. 그럼 내일보자.”
한 마디 더 하더니 쿨하게 나가버렸다. 당황한 아이들 그와중에 웅성거리는 아이, 어떻게 할 건지 묻는 아이 다양한 반응들이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남학생이 슬쩍 눈인사를 하더니 곧 말을 붙인다.
“쓸거야?"
“넌 안 쓸거야?”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아이를 한 번 쳐다보고 그 교실에서 나왔다. 그렇게 글쓰기 서바이벌이 시작되었다.
글쓰기 서바이벌. 그렇게 표현하는 게 적당하다. 우리는 한학기 내내 일주일에 한 편 씩 글을 써 내야했다. 첫 과제 이후 스무명이 열댓명으로, 열댓명이 예닐곱명으로 줄어드는데 한달이 안 걸렸다. 목적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글을 일주일에 한 편씩 쓰고 있었다. 심지어 자필로 다 써야했다. 워드 프로그램은 쓸 수 없었다. 고치기 위해 지우고 또 쓰고 하는 노력을 덜기 위해 워드로 완성한 글을 노트에 베껴쓰는 일을 매주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글의 평가를 받으러 교무실로 가야한다. 선생님이 내어주는 의자에 앉아 선생님이 글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린다. 교무실 안의 선생님이 모두 나를 보고만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지야, 이 문장은 왜 이렇게 썼니?”
어디가 잘됐고 어디가 잘못됐고, 이렇게 고치면 더 좋아질 거야가 아니다. ‘왜 이렇게 썼니? 왜 이런 구성이니? 왜 이렇게 말하니?’ 모든 질문에 왜? 가 붙는다. 대답을 하면 하는대로 왜의 꼬리가 꼬리를 문다. 대답을 못하면 가차 없다.
“다시.”
일주일에 한 편 글을 써서 검사를 받으면 교무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될 것인데, 다음 글의 소재가 제시될 때까지 일주일 내도록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서 교무실로 향한다. 연필로 쓴 글이 지우개질에 너덜너덜 해질 때가 되어야
“이제 그만 고쳐도 되겠다.”
잘했다가 아니라 그만해라였다. 길랄라는 그렇게 칭찬에 인색했다. 교무실 문 밖에서 눈물글썽이던 다른 아이들을 본 게 몇번이던가. 나라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똑같은 글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도 알 수 없는 글을, 적어도 5번, 많게는 7-8번씩 고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 날이면 내가 다시는 글을 써가나 봐라.' 하며 이를 북북 갈았지만 다음날이면 교무실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내 자존심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노트를 들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2학기가 되었을 때, 그 교실에는 다섯명만이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길랄라의 목적을 몰랐고, 우리가 쓴 글의 이유를 몰랐다. 우리에게는 길랄라를 향한 공동의 증오 같은 것, 오기 같은 것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길랄라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고생을 한 이유는, 너네 상 좀 받게 해줄려고.”
다섯 남은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저게 뭔 개소리야.’를 외쳤지만, 입밖으로는 낼 수 없었다.
“정아라, 최유준 둘은 시, 박상진 시조, 이지원 수필, 김지야 창작. 앞으로 너희가 주로 써야할 종목이다.”
“왜요?”
“토 달지 말랬지? 10월에 도학예발표대회가 있거든. 거기에 출전할 거야. 올해는 입상이 목표고, 그 대회때까지 도내에서 열리는 백일장은 다 참여할 계획이야. 지혜야, 창작은 종목에 없는 백일장도 있으니까 수필도 쓰자.”
길랄라는 싱긋 웃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창작과 수필 두 편을 써야 한다는 것임을. 햐얗게 질려 되물었지만
“할 수 있지?”
하는 두려운 미소가 딸린 대답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백일장 정예대원이 된 우리는 그 가을 오지게도 많은 글을 써야했다. 한학기 내내 여름방학에도 계속 일주일에 한 편 씩 글을 써낸 우리의 내공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최유준을 시작으로 속속 각종 백일장의 상장들이 학교로 보내졌다. 자랑삼아 말하자면 그 중 내 상장이 제일 많았다. 비록 학예대회의 입상은 내 차지가 아니었지만. 그 다음해 가을이 되어서야 학예대회에 입상했다. 2등이었다. 그때도 선생님은, ‘2등은 의미가 없는데.’하셨다.
고3이되자 모두들 내가 문예창작이나 국문학을 지망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나는 사범대를 원했다. 나의 생기부를 펼쳐 놓고, 문창과 수시 전형을 권하던 담임은 수상실적이 아깝다면 안타까워했다. 그날 오후 길랄라가 나를 불렀다. 2학년 가을 이후 우리 백일장 정예요원들은 해산되었다. 그 이후 그녀를 이렇게 따로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사범대는 왜 가려고?
시작부터 왜인 질문이었다. 주저리 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선생님의 마음에는 안 들었나보다.
“그렇게 어쭙잖은 생각으로 가봐야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끝날텐데.”
나는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옆 학교 서지아는 글로 먹고 살고 싶다고 하던데. 그 생각은 없어?”
학예대회 일등 한 아이다. 나는 단연코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울음을 참느라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그 계산은 끝난 뒤였다. 선생이 되는 것과 소설가가 되는 것. 어느 쪽이 더 현실성이 있는지는 누가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글로 먹고 살 생각은 없냐?’는 그녀의 말에 눈물부터 났다. 그건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알았다며 그만 가보라 했다. 억지로 삼킨 눈물이 교무실 문을 닫음과 같이 튀어나왔다. 화장실로 뛰어가 펑펑 울었다.
그 이후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서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내가, 함께 고생했던 그 시간들을 배신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마음으로는 그녀를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녀의 퇴직으로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예언 아닌 예언대로 어쭙잖은 생각으로 사대를 간 나는 선생이 되지 못했다. 당연히 글로 먹고 살지도 못한다. 대신 글쓰기를 꽤 즐거워하는 어른이 되었다.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단어를 고르고 타자를 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시절 거의 인간 병기 수준으로 갈고 닦은 덕이다. 그러니 그 공은 그녀의 몫이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이제 와서 다시 만나도… 뭐…) 이렇게 글을 쓸 때면 매번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내 어깨 쯤에서 내 글을 평가한다. 그녀는 내 글의 첫 독자이자, 엄격한 검열자로 매 순간 나타났다. 대학시절 혹독한 발표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 엄격한 검열자의 덕이었다. 나는 이미 잘 듣는 척하며 한 귀로 흘리기를 마스터했던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길러 준 것, 독설에 버티는 요령을 터득하게 해 준 것, 여전히 나의 검열자로 남아있는 것 등 많은 것에 감사하다. 특히 2년동안 가을마다 다녀야했던 백일장은 더욱 감사하다. 학교를 빼먹을 수 있어서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던 것이 상장으로 돌아와서 내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그 시절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나름 마음에 든다는 소리다.) 그래서 안 보이는 곳에서나마 그녀에게 감사를 드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