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2. 박지영, 김훈
박지영 (22.6.10). 고독사워크숍. 문학동네
고독하게 살아가던 이들이 “오늘부터 고독사를 시작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발신인은 ‘심야코인세탁소’. 수신인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메시지에 솔깃한다. 조용히 세상에서 증발하고 싶은 이들,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죽고 싶은 이들,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자신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워크숍에 참여한다.
워크숍의 목표는 고독한 죽음을 예비하는 것. 참가자들은 각자의 워크숍 페이지에 자신의 고독한 일상을 업로드한다. 어떤 이는 매일 도서관의 책들에 그어진 밑줄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는다. 어떤 이는 생산이 중단된 맛의 아이스크림을 다시 생산해달라는 e메일을 아이스크림 회사에 보낸다. 누군가는 매일 조금씩 더 긴 의자를 뛰어넘는 훈련을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매일 한 사람을 위한 농담 하나씩을 만든다.
업로드를 하다보니 이상한 일이 생긴다. 몇 주간 매일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꺼내 마주하다 보니 자신의 얼굴, 그 민낯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의 이야기에 댓글로 반응하며 고독사워크숍에서 아이러니하게 연결의 힘을 느끼게 되는데...
고독사워크숍을 이끌어가는 핵심 공간은 심야코인세탁소. 이곳은 쌓이고 쌓이는 빨래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이 응축된 공간이다. 동시에 주변의 소음과 방해로부터 벗어나 적막과 고독을 경험하는 장소이기도 한데....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코인 세탁기는 수건, 양말, 속옷에 묻은 일상의 흔적들을 지워 낸다. 중요한 것은 시시한 일상의 반복을 견뎌내는 것. 그리고 삶에 필연적인 고독에 익숙해지는 것. “분명하고 다행하게 예비된 고독사”를 준비하는 일은 곧 삶을 견디는 힘을 기르고, 서로가 고독의 코어를 단련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데.
<고독사 워크숍>, 흥미로운 컨셉이라고 생각한다. 명랑하지만 고독하고, 고독하지만 더불어 함께 웃고울고, 무엇보다도 잘 늙고, 잘 죽고 싶은 나의 바람에 이 책이 작은 워크숍 가이드북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
제게 코미디는 용서하는 장르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을 용서하고, 누군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며 바보같이 굴어도 관대하게 대하며 비난 대신 웃음을 보여 주는 유연하고 배부른 장르 말입니다. 자신의 불행한 과거에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고 과거의 불행을 용서하는 일, 자신의 비극을 포용하는 일에 능한 사람들이 코미디언이 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네, 저는 코미디언이란 용서하는 사람, 바보 같은 자신을 용서하고 잘못을 저지른 타인을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코미디는 반복의 장르입니다. 반복이 만들어 내는 웃음 때문에 저는 코미디를 사랑합니다. 코미디는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면서, 그 되풀이와 반복과 번복 속에서 웃음을 발명해 냅니다.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코미디 안에서 다시 시도한다는 건 우리가 과거에 실패했단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웃음을 발명해 낼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이야기니까요. (p. 171)
궁금한 것은 회고록에 나온 무언가 한 시간들이 아니라 회고록에 나와 있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7시 18분에 일어난 후 10시 23분이 되기까지, 4시 8분부터 4시 59분까지, 그리고 화요일 새벽 3시 14분에 깨어나 그는 무엇을 했을까. 양치질이나 체조,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 따위의 일상적인 일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 기록되지 않은 빈틈의 시간들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다. 기록으로도 남지 않은 진짜 고독한, 그리하여 XXL 사이즈의 고독 같은 채워지지 않는 농담의 시간.(p. 199)
고독사 워크숍을 시작하며 이수연이 깨달은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는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고독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고독의 코어를 단련해야 한다는 거였다. 고독이란 단순히 마음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균형과 근력의 문제였다. 친절과 배려가 탄수화물에서 나오듯 고독할 수 있는 힘 역시 강인한 체력과 단련된 근육에서 나왔다. 타인의 고독을 지켜 주는 힘 역시. 일 분이라도 혼자 플랭크 자세를 해 본 사람은 알게 된다. 혼자 버티며 산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수연 역시 반복된 훈련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의 고독은 대체로 단련될 수 있다는 걸.(p. 254)
김훈 (22.06.01), 저만치 혼자서. 문학동네
세월이 지나니 견딜 수 있게 된 일들과 갈수록 드러내기 어려워지는 연약한 감정과, 흐르는 시간 앞에 겸허해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깐 인생과 존재와 삶과 나이듦에 대해 저만치 혼자서 숙고하고 고민한 김훈 작가님의 소설집이다.
<저만치 혼자서>는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수녀원에 모여 살게 된 늙은 수녀들과 그들을 편안한 임종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하는 젊은 신부의 나날을 그린다. 성직자들조차 죽음이라는 미지의 사건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번민하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여 안식에 드는 모습이 처연한 안도감을 남긴다.
<저녁 내기 장기>는 가정이 해체되고 일터에서 밀려나는 등 각자의 비극을 품은 채 알지 못하는 상대와 장기를 두는 것으로 외로움을 견디는 노년의 애환을 안구건조증이라는 보편적인 노화 증세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대장 내시경 검사>에서 직장을 은퇴하고 명예 임원직에 이름을 올린 ‘나’는 처리할 일과 부탁받은 일들에 대한 고민을 대장 내시경 검사 이후로 미룬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그 일들 중에는 과거의 연인 ‘나은희’가 보내온 인사 청탁도 있다. 때로는 과거의 추억에 깃든 감정을 곱씹으며 일상을 지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감정을 정리하고 나아가야 하는 인생의 쓸쓸한 단면을 그린다..
<영자>는 작가가 노량진에서 생활하는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을 관찰하며 쓴 이 단편이란다. 너무 이른 시기에 삶의 냉혹성을 깨닫고 나이 들어버린 청춘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이 세상에 진입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마는 아이러니를 포착했다는데.
김훈 작가님의 이 단편들을 작가의 자리가 아닌 이웃의 자리에서 썼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의 언어로 삶의 언어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고, 글이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런만큼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과 절망을 조심으럽게 다룬다는데... 김훈 작가님. 애정합니다.
수억 년의 새벽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해가 떠올라 빛과 어둠이 스미면서 갈라졌지만 바다에는 시간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의 시간은 상륙하지 않았다. 바다는 늘 처음이었고, 신생新生의 파도들이 다가오는 시간 속으로 출렁거렸다. 아침에, 고래의 대열은 빛이 퍼지는 수평선 쪽으로 나아갔다. 고래들이 물위로 치솟을 때 대가리에서 아침햇살이 튕겼고, 곤두박질쳐서 잠길 때 꼬리지느러미에서 빛의 가루들이 흩어졌다. _「명태와 고래」, 9~10쪽
법원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읽으면서 이춘갑은 한 생애의 모든 일상이 소멸된 자리에서 갯벌처럼 드러나는 공터를 느꼈다. 이춘갑은 경남 해안의 여러 소읍과 포구를 옮겨다니며 자랐다. 이춘갑은 아버지의 생업이 무엇이었는지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밥이라는 천형을 복역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고, 태어났을 때부터 무기징역을 받은 것 같았다. _「저녁 내기 장기」, 106쪽
나는 사람들 틈으로 뒷모습만 보고도 나의 전처, 월롱동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특징이 그런 식별을 가능케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전처 월롱동은 확실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간 세월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불화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익숙한 만큼 낯설었다. 월롱동은 거스를 수 없는 그 시간의 무게를 모두 깔고 앉듯이 문상객들 틈에 앉아 있었다. 남의 뒷모습이 마음속에 새겨진 듯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태는 견디기 어려웠다. _「대장 내시경 검사」, 142쪽
임하사의 분대는 작업장의 잡초를 제거했고, 파낸 흙을 들것으로 옮겼다. 임하사는 들것을 들고 구덩이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뼛조각들을 들여다보았다. 뼈들은 헐거워 보였다. 작은 구멍들 사이에 봄볕이 오글거렸다. 뼈들은 오십 년 만의 햇볕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_「48GOP」, 209쪽
봄부터 초겨울까지, 수녀원 마당에서 장미는 피고 지기를 잇대었고, 지면서 더욱 피었다. 꽃 한 송이는 죽음의 반대쪽에서 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꽃이 지는 것이 죽음은 아니었다. _「저만치 혼자서」,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