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의 여름 (1)
내 이름은 연우. 서울의 평범하고 누추한 동네 한 켠에 자리잡은 연우 수리점 딸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동네의 각종 고장난 물품들의 수리를 도맡아하고 있죠. 아버지처럼 가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인디밴드 보컬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장난 물건을 고치는 것도, 카페 ‘아르투고 도밍고’에서 부르는 노래도 아버지만큼 잘 하지 못해요. 그렇지만 오늘도 저는 조물조물 작은 나사를 조였다 풀러 보고, 낡은 기타를 꺼내 멜로디를 연주하며 한여름밤 소나기 같은 노래를 만들고 있답니다.
제 마음을 끌어당기는 일은 화려한 손놀림도, 스펙타클한 노래도 아니에요. 집 안에 뒹구는 낡은 트렌지스터 라디오와 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오래되고 평범한 노래를 좋아해요. 헐렁한 티셔츠에 스니커즈를 신고, 백팩과 기타를 메고, 지나친 장식과 화장 없이, 발가락에 매니큐어도 발라본 적 없는 저의 자연스러움을 좋아하죠. 아니 좋아했죠. 적어도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말이죠.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엄마 대신 빌딩 청소를 하게 되면서였어요. 엄마가 청소 중에 허리를 다치셨거든요. 엄마의 대타로 딸이 빌딩 청소를 한다? 때론 그런 예기치 않은 일들을 해내야 하는 게 삶인 것 같아요. 엄마를 고용한 용역업체에서 대신하지 않으면 해고한다고 윽박을 질렀거든요. 매정한 놈들....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해야 할 때는 또 화끈하게 하는 게 연우 스타일이랍니다.
엄마가 청소를 하는 빌딩은 누구든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 사옥이었어요. 그런데!! 출근 첫날 거기서 초등학생 동창생을 만난 거예요. 6층 홍보실 입구가 무엇을 흘렸는지 끈적거린다는 호출을 받고 대걸레를 들고 뛰어 가는데 하이힐을 신은 누군가가 살~짝~ 대걸레를 피하면서 ‘어머!’ 하는 거예요.
“나 윤지완. 상성 초등학교. 기억 안나?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여기서 보지?”
윤지완. 윤지완. 아... 그 윤지완?
지완이는 초등학교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였어요. 어느 여름 날 이사를 갔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커리어우먼이 되어 제 앞에 짠 나타난 거죠, 사내 아나운서로 홍보팀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지완이와 저는 같은 공간에 직장 동료가 됐어요. 물론 완전히 다른 소속에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지완이의 하루는 저와 다른 결에서 바빴어요. 한 팀장이라는 상사가 있었는데, 엄청 따라 다니더라구요. 연청색 체크무늬의 청회색 양복을 입은 한 팀장은 인상 좋은 중년 아저씨였어요. 지완이는 이 아저씨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했고, 팀장이 어디론가 따라오라 하면 파우치에서 고체 향수를 꺼내 목과 손목에 쓱쓱 문지르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가곤 했죠. 지완이는 목에 건 대기업 사원증을 나풀나풀 대며 회의실과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오갔고, 그 시간에 저는 용역업체에서 준 청소복을 입고 구석진 창고와 옥상 화단과 복도, 화장실을 오가며 쓰레기를 치웠죠.
몸을 쓰면 시간이 참 잘 가요. 아침 일찍 출근하여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는 철제 캐비넷에서 청소복을 꺼내 입고, 1층 로비에서 체조를 하면 청소가 시작됩니다. 복도, 화장실, 사무실, 옥상 정원을 쓸고, 닦고, 치우다보면 동쪽에 떠 있던 태양은 금세 서쪽으로 기울었어요.
가끔 옥상 정원에 홀로 남을 때면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곤 했죠. 높은 빌딩, 현란한 광고판들, 그 위에 떠있는 구름들, 그 아래 움직이는 사람들. 구름도 사람도 오랫동안 비우지 않아 진공청소기 속에 뭉쳐있는 먼지뭉치처럼 보였어요. 이런 게 직업병이라는 겁니다.
먼지뭉치와 함께 하는 일상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은 점심시간이었어요. 엄마의 절친인 나미 이모와 함께 층과 층 사이에 자리한 작은 휴게 공간에서 밥을 먹곤 했는데, 좁은 창고가 답답해 땀이 삐질삐질 나곤 했지만, 나름대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시간이었어요.
“이 빌딩은 층 사이마다 이런 작은 공간이 있어. 밥은 이래 해먹고, 밑반찬은 번갈아 싸오는데 이번 주는 내가 싸오면 되고. 지하에 직원 식당이 있는데 비싸. 한 달에 식비 4만원 받는 걸론 어림도 없지. 돈 아까운 것도 있지만, 우리는 근무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못 타요. 지하까지 시간 버리며 계단 오르내리느니 여기서 뜨신 밥 해 먹는 게 낫지. 지금 안 먹으면 먹을 시간 없어. 얼른 먹어.”
나미 이모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양철 식판에 밥을 듬뿍 퍼줬어요. 덥고 습한 창고 같은 휴게실, 이모가 건네준 찌그러진 양철 식판, 그 위에 담긴 따뜻한 밥, 정성스런 반찬. 땀은 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속에 흐르는 온기에는 무언가 감동적인 것이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깐 본격적인 사건은 엄마 대신 청소를 하기 시작한지 삼일째 되던 날 펼쳐집니다., 퇴근길에 도로에서 “빵~”하는 경적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돌아보니 지완이가 차 안에서 “연우야” 부르며 빨리 타라고 손짓을 하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
“연우야, 나 대신 소개팅 좀 나가줘. 아빠 친구 아들이래. 몇 번 퇴짜 놓다가 지난달부터 잡은 약속인데. 갑자기 회사에 중요한 일이 생겼어. 이번에도 물리면 아빠가 날 죽일지도 몰라.”
지완이가 모는 볼보 차는 월세 160만원에 산다는 역삼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멈춰 섰어요. 그렇게 전 지완이가 추천한 옷, 지완이가 아껴 신는 신발을 신고 소개팅장으로 가게 됐죠. 왜 거절을 못했냐구요? 그러게요.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떤 새로운 장에 내몰리게 되는 경우가 있죠.
그렇게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 여름, 제 마음을 흔들어 놓는....
<2화에서 계속>
<KBS 드라마스페셜 2024> 올해도 단막극은 계속됩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려요.
★ <영복, 사치코> 다음주 KBS2TV 11월 26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PFKRnMm-vVU (예고편)
★ <사관은 논한다> KBS2TV 11월 5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0Rbo145-y9A&t=21s (하이라이트)
★ <핸섬을 찾아라> KBS2TV 11월 12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2eDb7d3ikww&t=38s (하이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