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의 여름 (3)
소개팅 이후 윤환 씨는 끊임없이 제게 신호를 보냈어요. 그 신호가 제 핸드폰이 아니라 지완의 핸드폰으로 전송되는 게 문제였지만, 저 역시 이 신호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완씨. 잘 들어가셨죠? 오늘 즐거웠어요.”
“지완씨, 다음에 제게 만회할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지완씨, 이번 주말에 영화 볼래요?”
지완이는 자기 이름으로 오는 윤환씨의 문자가 처음에는 재미있다가, 시간이 갈수록 불편하고 귀찮아진 것 같아요. 당연하죠.
“연우야... 또 윤환씨한테 연락 왔어. 문자 내용은....”
이것도 하루 이틀이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오는 문자가 귀찮아진 지완은 윤환에게 제 전화번호를 알려줬대요.
“핸드폰 번호 네 걸로 바꿨다고 했으니깐 이제 네가 알아서 적당히 끝내. 그새 영화도 보러 갔음 예의는 다 한 거잖아. 길게 만나봤자 서로 골치 아프기 밖에 더하겠니?”
확실히 골치는 아팠어요. 처음부터 연우가 아니라 지완으로 만난 것이기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구요. ‘뭐하는 중이에요?’라는 질문에 전 지금 화장실 청소 중이지만, 지완이 방송실에서 녹음 중이라면, ‘지금 녹음 중이에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지완은 사내 방송에 열심이었어요.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애정하는 것도 있지만, 선배 한팀장을 좋아하는 것도 열심의 이유였어요. 한팀장이라는 사람은 유부남이라고 하는데, 지완은 그런 게 누구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며, 누가 보더라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곤 했죠.
지완이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유부남 한팀장을 좋아하고, 저는 지완의 이름으로 윤환과의 관계를 이어가던 여름의 어느 날들. 지완이도 저도 뭔가 변화가 필요했지만 둘 다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어요. 변화의 계기가 될 그 무언가가 보이지 않던 거죠. 가슴 속 어딘가가 누군가 때문에 욱신거리다 한들, 어떤 변화에는 구체적인 시작이 필요한 법인데, 저도 지완도 그 시작 앞에 망설이고 있었죠.
내가 지완이가 아니라고 말하면 윤환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한팀장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한팀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렇게 망설이면서 제 안에서 이상한 변화가 시작됐어요.
자꾸 자꾸 연우의 청소부 유니폼과 날 것의 민낯이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저의 자연스러운 민낯보다 지완이의 화장, 메이크업, 출입증, 화려함을 부러워하게 되더라구요. 그것은 저를 지완이로 알고 좋아하는 윤환이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기도 했어요. 모두가 지완이는 좋아하거나 시샘하지만, 청소부 옷을 입은 저는 무시하는 것 같았죠.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났고, 어느 평범했던 비 내리던 점심시간, 6층 복도에서 대걸레질을 하는데 윤환에게 문자가 왔어요.
“저 지금 출장에서 돌아왔어요. 지완씨 지금 바빠요?”
그때 스피커로 지완이 진행하는 ‘정오의 OST’ 방송이 울려 퍼졌죠.
“정오의 OST 윤지완입니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리네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사운드트랙 중 비욕의 ‘Amphibian'을 듣고 계신데요. 유명 배우 존 말코비치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낸 주인공이 나오죠. 존 말코비치의 명성을 쫓다가 결국 사랑하는 여인은 물론 자신의 삶까지 잃어버린다는 내용인데요. 아무리 동경하는 사람의 삶을 산다 해도 내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겠죠?”
이게 지금 날 맥이는 건가? 아니면 자격지심인가? 빗줄기가 거세지는 오후 내내 기분이 좀 나빴죠.
스튜디오 앞을 지나다 한팀장을 향해 가증스런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지완의 모습을 봤어요.
‘얄밉다. 밉다.’
짜증이 나 들고 있던 대걸레를 확 내동댕이쳤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나의 행동들. 의미 없다. 의미 없다.
문득 윤환씨에게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사실을 말해야겠다는 다짐.
“우리 술 한 잔 해요. 할 말 있어요.”
그렇게 윤환씨에게 답문자를 보냈죠.
그날 저녁, 저의 아지트 아르투고 도밍고에서 윤환씨를 만났어요. 지영언니와 기오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고, 전 지완이의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이 아니라, 연우의 헐렁한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와 마주했죠.
“지완씨... 오늘은 좀 달라 보여요.”
“평소엔… 저 원래 이래요.”
“보기 좋아요. 편해 보여요. 지완씬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이미지랑 다른 거 같아요. 사실 아버지한테 아나운서라고 얘기 듣고 걱정 많이 했거든요."
....
"지완씨, 다음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대학 동기들 모임이 있어요.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어서...”
그날 저녁, 전 정작 꺼내야 할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윤환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어요. 그러다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확 들었죠. 아니 정신이 나갔죠. '지완이'로서 연애하기 놀이를 끝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윤환씨를 도발하기 시작했어요.
“저 좋아해요?”
윤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어요.
“네”
그의 거침없는 대답을 듣고, 그가 마치 연인처럼 제 손을 잡는 것을 느끼면서, 전 또 한 번 도발했죠.
“왜요? 왜 좋아해요?제 스펙이 좋아서요? 대성그룹 아나운서라서요? 제가 윤지완이라서요?”
윤환씨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더니 당황한 표정이 새겨지기 시작했어요.
“지완씨 무슨 일 있어요?”
윤환씨를 한 번 바라보고, 우리를 바라보는 지영언니와 기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제가 애정하는 아르투고 도밍고 카페를 한 번 훑어봤어요. 나의 아지트, 나의 친구, 나를 좋아하는, 아니 윤지완을 좋아하는 윤환씨. 문득 저를 둘러싼 여름날의 풍경에 피곤해졌어요. 집에 가고 싶어졌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전 그에게 그냥 집에 가겠다고, 혼자 가겠다고, 피곤하니깐 같이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가 잡은 손이 어색하게 느슨해졌고, 전 조급하게 뒤돌아 집으로 향했죠. 하늘에서 여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신발도, 옷도, 마음도 흠뻑 젖은 밤이었어죠.
연우의 여름... 왜 이 모양인 거야? 그렇게 뒤돌아 선 제 모습이 정말 초라하더라구요.
설상가상. 집에 도착하니 아픈 허리를 쥐어 잡고 청소를 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어요. 몇 주만에 퇴원하더니 집에 오자마자 청소를 하는 거야? 또 짜증이 났죠.
“엄마! 아프다며 뭐 하는 거야?”
짜증이 나 들고 있던 가방을 확 내동댕이쳤어요. 그러면서도 반가웠어요. 엄마...엄마...엄마... 엄마가 돌아온 거예요.
<4화에서 계속>
<KBS 드라마스페셜 2024> 올해도 단막극은 계속됩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려요.
★ <영복, 사치코> 다음주 KBS2TV 11월 26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PFKRnMm-vVU (예고편)
★ <사관은 논한다> KBS2TV 11월 5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0Rbo145-y9A&t=21s (하이라이트)
★ <핸섬을 찾아라> KBS2TV 11월 12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2eDb7d3ikww&t=38s (하이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