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코로나 19가 떠난 자리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읽기 3

by 오윤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 19, 끝날 것 같지 않은 장마,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것 아닐까? 지옥의 불꽃처럼 타오르던 오랑의 페스트도 그랬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었고, 4명의 환자가 살아났다. 페스트 시작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쥐들도 돌아왔다. 페스트가 사라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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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가 사라져가던 1월, 오랑시의 시민들은 흥분과 우울을 번걸아 가며 겪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페스트는 깊은 비관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희망은 그들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페스트의 시대는 만료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계속 이 페스트를 기준으로 살아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는 반대로 희망의 바람이 일었다. 장기간의 유폐와 낙심을 겪은 후 일어나는 희망은, 그들에게서 모든 자제력을 앗아 가는 열광과 열정에 불을 질렀는데, 특히 그때까지 사랑하는 존재들과 떨어져 지내 온 사람 중에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해오던 장타루는 페스트가 물러난 도시, 결국 페스트가 창궐하기 직전의 오랑과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안 바뀔 것이지만,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으며, 페스트는 적어도 많은 이의 마음 속에 흔적들을 남길 것이라 생각했다(p. 266~278).


그리고, 페스트의 막차를 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장타루였다. 페스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치열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고 돕고 싸우던 장타루가 페스트에 걸린 거다. 그는 페스트라는 사냥용 창에 의해 구멍이 뚫리고, 초인적인 악에 의해 불타 버리고, 하늘의 온갖 증오의 바람에 의해 뒤틀려 페스트의 검은 물속으로 침몰해갔다. 이 난파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장타루의 죽음에 대해 의사 리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나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이 침묵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은 너무 촘촘하고, 거리의 침묵,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의 침묵과 너무도 긴밀하게 일치하고 있기에, 이번 패배가 결정적인 패배임을, 전쟁을 끝내 평화 자체를 치유 불가능한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패배임을 느끼고 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나 혹은 친구를 묻은 사람에게 종전이란 없는 것과 같이 나에게도 평화란 결코 더 이상 있을 수 없음을 알 것 같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고백하지 못했고, 그렇게 또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p.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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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타루는 스스로 말했듯이 경기에서 졌다. 그렇다면 이전쟁의 패배를 온몸으로 마주한 사람, 의사 리외와 같은 장타루의 친구들, 가족들, 그러니깐 살아남은 사람들, 이 시간 속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이에 대하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얻은 것은 오직 페스트를 겪었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우정을 겪었고 또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 정을 체험했고 또 언젠가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삶과의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는 경험과 기억이었다(p. 289).


얻을 수 있는 전부가 경험과 기억뿐인 삶. 만약 어떤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경험과 기억뿐이라면, 여기에 희망과 환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면, 그게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에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찢김과 모순의 일상 속에서 어떤 윤리로 살아야 할까? 어쩌면 장타루도, 의시 리외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성스러움을 원했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봉사에서 평화를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타루가 죽고 얼마 뒤 리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는다. 그는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도 힘들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고통이 뜻밖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러 달 전부터, 그리고 이틀 전부터 똑같은 아픔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삶이란~~~~).


의사 리외가 누군가와 이별을 하던 시간, 취재차 오랑에 왔다 오랑에 갇혀버린 기자 랑베르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파리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단번에 오랑을 빠져나갔을까? no. 랑베르는 봉쇄가 풀린 후 한달음에 시 밖으로 달려 나가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러 뛰어가고 싶어 했던 사람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는 변해 있었다. 이는 비단 랑베르만의 마음이 아니었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랑베르와 비슷했다. 이에 대해 카뮈는 역승강장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역 승강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로 눈짓과 미소를 교환할 때, 오랑에 남아있던 자들은 여전히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기차의 연기를 보게 되면 곧 혼돈스럽고 정신을 잃게 하는 기쁨이 쏟아져 내려, 귀양살이 시절의 감정은 갑자기 사라져버리곤 했다. 기차가 멈춰 서자, 그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기약없는 이별들이, 신이 난 아귀처럼 다시 팔로 얼싸안는 동일한 장소에서 순식간에 끝이 났다.
랑베르는 어떤 형체가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볼 겨를도 없었는데, 그것은 벌써 그의 가슴에 쓰러지듯이 안겼다. 그리고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낯익은 머리카락밖에 안 보이는 머리를 가슴에 껴안자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지금의 행복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며 너무나 오랫동안 억누른 고통에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눈물이, 자기의 어깨놀이에 파묻혀 있는 그 얼굴이 과연 그 자신이 그렇게나 꿈꿨던 얼굴인지, 아니면 반대로 어느 낯선 사람의 얼굴인지를 확인하지 못하게 막아 주리라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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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든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대부분은 자신들이 아픔을 겪은 장소들을 조심스럽게 순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 시절에 네가 간절했는데, 거기 네가 없었어.”

이런 연정의 목소리들이 쉽게 들리곤 했다. 이들은 사람을 한 명 죽이는 일이 파리를 죽이는 일만큼 일상적이던 세상, 분명하게 규정된 야만성, 계산된 광기, 감금생활, 모든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하던 치명적 냄새, 누군가가 매일매일 화덕의 아궁이 속에 쌓여 지방질의 연기로 사라지던 순간의 무력감과 공포,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질겁한 민중이었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반박하고 있었다.


이들은 힘들었던 무위, 치유책 없는 귀양살이, 시체 더미, 구급차의 경적,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던지는 충고, 공포의 끈질긴 제자리걸음에 대해서는 이제 고개를 돌리고 싶어했다. 언덕 위의 향기로운 덤불 속에, 바다 속에, 자유로운 고장과 사랑의 무게 속으로, 그러니깐 이상적인 고향을 향해, 행복을 향해 되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얼마 동안은 행복할 것이다.


페스트의 이야기는 이 행복의 목소리를 보여준 후 여전히 거리에 자리한 무정한 목소리, 그리하여 진실된 삶의 한 단면에 주목하면서 마무리된다. 리외는 늘 그랬듯이 아픈 환자의 집을 찾았고, 그 집에는 연로한 노인 한 분이 있었다. 이 대목을 조금 길지만 옮겨본다.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대목이다.


리외가 늙은 환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온 하늘을 덮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옳아요. 즐겨야지. 세상엔 모든 일이 다 필요한 법이오. 그런데 선생의 동료분은 어떻게 됐소?”

그가 말했다.

“죽었습니다.”

의사는 노인의 거품 소리 나는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그렇게 말했다.

“아!”

노인이 소리를 냈다.

“페스트로요.”

리외가 덧붙였다.

“예.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떠나게 되죠. 산다는 게 그래요.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이었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청진기를 거두면서 리외가 말했다.

“그냥요. 그 사람은 허튼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페스트, 우리가 페스트를 이겨냈어라고 말하고 있겠네요. 그런 작자들은 조그만 일로 훈장을 달라고 할지 몰라요. 허나 페스트라는 게 대체 뭐겠어요? 살다 보면 생기는 일일 뿐이죠. .... 오! 걱정마요. 나는 아직 살날이 창창해요. 난 그 작자들 모두가 죽는 것을 볼 겁니다. 나는 말이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아요.”

“테라스에 좀 가봐도 괜찮을까요?”

“오 물론이죠! 저기 위에서 그 작자들을 보고 싶은 거죠. 그렇죠? 그렇게 해요. 그렇지만 저들은 정말 항상 똑같아요.”

리외는 계단으로 갔다.

“그런데 선생님,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운다는 게 정말인가요? 신문에서 그러더군요. 석주나 동판이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리고 연설을 하겠군요.”

노인은 킥킥 웃어 댔다. 여기서도 그것들이 훤히 들려요.

‘고인들은..’ 그러고는 허겁지겁 먹저 치우겠죠. (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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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기억.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의 기억을 어떻게 먹어 치울 것인가? 언젠가 불연 듯 코로나 19가 물러난 자리에서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즐겨야 할 때는 즐겨야 한다는 이야기, 세상엔 모든 일이 다 필요하다는 긍정,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먼저 떠나게 된다는 안타까운 진실, 허튼 이야기는 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들의 고귀함, 페스트든 코로나든 장마든 모두 화들짝 놀라지만, 살다보면 생기는 일일 뿐이라는 따뜻한 위로, 언제나 그렇듯 일이 마무리된 후에야 동판에 허겁지겁 추모비를 세우고 자신의 공적인양 먹어 치우는 권력자의 행태 등등 한 노인의 목소리를 통해 카뮈는 인생과 사회의 면모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의사 리외는 어두운 항구 축하 행사의 첫 불꽃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노인의 말이 옳다. 사람들은 항상 같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들의 힘이자 무고함이고, 바로 여기에서 나는 그들과 하나라는 걸 느낀다. 우리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의 기억, 재앙의 한복판, 거기에서 배운 것은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앙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p.306).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많다!

어쩌면 <페스트>를 통해 카뮈가 코로나 19를 넘어서고 있는 지금 시대에 하고픈 이야기는 이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페스트>는 카뮈가 알제리의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1938년부터 구상을 시작해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필한 작품이라고 한다.


어느 늦은 봄날, 페스트가 오랑시를 덮치면서 약 10개월 동안 도시 사람들이 겪는 사투를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그린 작품. 이 작품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전염병과 공포에 맞서 인간이 수행해야 했던 본분, 성자가 될 수는 없으나 최선을 다해 사람을 돕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분에 충실한 성실함.


다양한 이력과 본분을 가진 사람들의 성실함이 자원보건대를 매개로 공동선을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카뮈는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성실함은 앞으로 더 중요할 거다. 왜? 그 이유는 페스트의 마지막 단락으로 갈음한다.


실제로 도시에서 올라오는 환희에 찬 함성들을 들으면서 리외는 이런 환희가 늘 위협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쁨에 찬 이 군중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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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코로나 19에 대한 이야기도 마친다. 코로나 19시대, 뉴노멀의 시대, 뭐라 부르든, 우리가 지금 이 시간의 경험에서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본분에 충실할 것, 성자는 될 수는 없으나 최선을 다해 옆에 사람들을 응원하고, 돕는 것,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음을 잊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Camus, A. (1947). La Peste. 김화영 역 (2011). <페스트>. 서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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