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페스트> 읽기 3
더위와 병이 절정에 달했을 때, 페스트는 군인들, 수도승들, 죄수들처럼 단체로 생활하는 모든 사람을 물고 늘어졌다. 병은 동시에 개개인을 고독으로 내몰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페스트는 대혼란을 가져왔고, 이 혼란에 대해 자원봉사단에 요구되는 것은 신속함이었다. 페스트가 창궐할 때 배려란 가능하지 않았다. 요컨대 효율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구조, 씁쓸하지만 재앙의 시대, 효용주의는 불가피한 선택지인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고통, 가장 깊고 일반적인 고통은 당연히 이별이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이별을 마주하면서 고통 자체는 비장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이별을 겪고 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었던 정감도, 가장 가깝던 존재가 그들 곁에서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카뮈의 표현대로라면 누구도 더 이상 거창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단조로운 감정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거 끝날 때가 됐어.’라는 바람은 빈약한 이성 위에서만 표현되곤 했다.
페스트의 확산 속도가 거침없이 절정으로 치달으는 시간, 이 순간의 사람들을 카뮈는 이렇게 묘사한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페스트가 모두에게서 사랑의 힘과 우정의 힘까지도 앗아가 버렸다. 사랑은 약간의 미래를 요구하는데, 우리에게는 순간들밖에 없었다. 아침마다 그들은 다시 재앙으로, 그러니까 틀에 박힌 생활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별당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할 것인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같은 모습, 완전히 일반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평온함과 유치한 소란스러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은 분명 여전히 거기에 있었지만 사용할 수 없었고, 지니기에는 너무 무거웠고, 우리 마음속에서 생기를 잃었고, 범죄나 유죄 선고처럼 메말라 있었을 뿐이다(p. 184~186).
의사 리외와 자원봉사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스스로에게서 기이한 무관심이 만연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지쳐 있는가를 발견할 정도였다. 그들은 밤낮으로 일에 몰입되어 신문도 읽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어떤 결과를 알려 주면 흥미롭다는 시늉은 하지만 실상 건성으로 무관심하게 대응했다. 재앙에 맞서 투쟁을 하던 사람을 무너뜨리는 결과는 외부 사건들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방치하는 부주의에 있다고 할까?
모두가 지쳐갈 때, 예외가 있었다. 탈진하지 않고 만족감의 살아있는 표상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 코타르. 그 해 봄날 자살 시도를 했던 그는 페스트와 더불어 생기를 찾고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좋지는 않아요. 하지만 최소한 모든 사람이 같은 처지에 있죠.”
그가 생기를 되찾은 이유다. 과거에는 자신 혼자 위협을 받았다면, 지금은 모두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위안이 됐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팔꿈치를 팔꿈치에게로, 이성을 이성에게로 밀어 대는 인간적인 체온에 대한 갈망? 코타르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이 모든 것을 경험했고, 그래서 페스트는 그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혼자 보던 모든 것, 당치 않는 두려움, 신경질적이고 격해지기 쉬운 감수성, 불안하고 경계하는 영혼들의 과민성, 세상에 대한 공포심에 있어 주변에 공범이 많지는 것에 위안을 느꼈다.
한편 파리에 있는 여자친구를 그리워하며 어떻게든 그 도시를 떠나려 했던 랑베르의 여러 시도들은 실패한다. 밀수업자들이 1000만 프랑을 받고 랑베르의 탈출을 돕기로 하는데 준비에 차질이 생기고, 다른 계획을 세울 때즈음 랑베르는 마음을 바꾼다. 만약 자신이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만 추구한다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며 도시에 머물면서 페스트와 싸움을 돕기로 결심한 것이다.
랑베르의 변화를 표현하는 대화들.
랑베르가 물었다.
“그런데 왜 내가 떠나는 것을 막지 않죠? 그럴 수 있잖아요.”
리외는 습관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것은 랑베르의 일이자 행복을 택한 것이기 때문에, 리외 자신은 거기에 반대할 논리가 없다고 말했다.
...
“저는 늘 이 도시의 이방인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볼 거 다 보고 난 지금, 원하든 원히지 않는 간에, 제가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이 일은 우리 모두와 관계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돌아설 만한 가치는 없어요.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나 역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 있죠.” (p. 203~ 209)
랑베르가 머물게 된 오랑, 페스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두텁게 쌓이면서 사람들은 일상적인 종교적 행위들로부터도 조금씩 돌아서곤 했다. 종교 행위가 미신들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들은 미사에 참석하기보다는 수호용 목걸이라든가 성 로크의 부적을 지니는 데 더 자발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부들 역시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랑시의 존경받는 예수회 신부 파늘루, 그는 페스트 발생의 첫 단계에서 신도들에게 페스트는 하나님이 자기에 반대하여 마음을 굳힌 자에게 보낸 재앙이라 강력하게 주장한다. 더불어 신이 도움과 희망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은 한 소년의 죽음을 직접 마주하면서다. 전신을 태워 버릴 듯한 불꽃의 공포에 질린 아이, 그 옆에서 파늘루 신부는 “구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어린애는 소리를 질렀고 숨이 멎어 버렸다. 얼굴에는 눈물자국을 남긴 채로... 이때 리유가 파늘루 신부에게 묻는다.
“페스트는 죄지은 사람에게 내린 벌이라면서요.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지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서도 거부하겠습니다.” 파눌루 신부는 말을 잇지 못한다. 한참 후 그는 페스트 시대 종교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페스트 속에서 섬이란 없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중간이란 없었던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을 증오하는가, 아니면 사랑하는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신에 대한 증오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님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힘든 사랑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자기 포기와 자기 인격의 무시를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 힘겨운 사랑을 계속해야 합니다(p. 223~227).
오랑시에 죽은 사람들이 급속도로 많아졌다. 죽은 자, 이들은 더 이상 산 사람들이 일 년에 하루 변명을 하러 찾아가는 소외된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침입자들이었다. 페스트는 정점에 편안히 자리 잡고서 착실한 관리처럼 정확성과 균형성을 기해 매일매일 살인을 저질렀다.
시간과 더불어 물자 보급의 어려움이 증가해 매일 다른 불안한 문제들이 터졌다. 사재기가 극성을 부려 일차적 필수품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부유한 가정들은 여전히 부족한 것이 없었던 반면, 빈곤한 가정들은 점점 더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페스트는 무차별적으로 오랑을 점령해 시민들 사이의 평등을 조장해야 할텐데 상황은 반대였다. 인간은 이기적인 마음의 작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불공정이라는 감정을 더 첨예하게 만들었다.
페스트에 감염된 사람들을 격리한 수용소의 풍경은 어땠을까? 하나같이 텅 빈 눈이었고, 모두가 자신들의 삶을 이뤄 온 터전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게 되어 고통 받는 모습이었다. 매순간 죽음을 생각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안 좋은 것은 그들이 잊혀진 사람들이라는 것,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 그들을 잊고 있었다. 수용소 밖 사람들은 감염된 사람들을 빼내어 격리시키는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더 이상 격리되고, 빼내진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수용소들의 존재, 거기서 나는 사람들의 냄새, 황혼 속 커다란 확성기 소리, 그 담들의 비밀, 그리고 그런 배척된 장소에 대한 두려움 등이 수용소 밖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모두의 당혹감과 거북함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음은 분명했다(p. 236~241).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 그것은 모두에게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하는 배경이었다. 누구도 세상에 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방심해서 감염균을 내쉬어 다른 사람의 얼굴에 붙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경계해야 했다. 페스트의 시대에서 선량한 사람은 가능한 한 방심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방심하지 않으려면 의지가 있어야 하고 긴장해야 했다. 그리고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만큼 재앙의 편이 되기를 거부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장타루는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정도를 가기 위해 선명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되도록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떤 경우든 희생자들 편에 서기로 결심한 겁니다.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에 있는 겁니다. ...때론 희생자들을 위해 싸워야 하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랑, 아닐까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싸운다는 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나 마찬가지죠. 감옥, 일, 용기 등에 진절머리가 나서 누군가의 얼굴과 감동적인 사랑의 마음을 바라는 시간이 꼭 오게 마련이죠(p. 253~259).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되는 배경 속에서 선명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희생자들 편에 서기로 결심하는 것, 사랑을 잊지 않는 것, 그리하여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감염균을 붙이지 않도록 스스로의 경계를 풀지 않는 것, 방심하지 않는 것, 뭐 하나 쉬운 명제란 없다. 그러나 오랑시가 페스트와 함께 보낸 그 여름을 떠올리며, 지금 여기에서 재앙의 편에 서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단 한 단어로 설명하면 그건 바로 사랑. 일상에서 상투적인 단어는 재난의 시대, 혁명의 단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