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사로 감정을 배웁니다 5.

'남'이 아닌 '님'의 시선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by 단비

‘남’과 ‘님’을 가르는 점 하나의 위력을 유행가 가사에서 배웠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 작사·작곡 조운파 <도로남> 노래 가사 중에서


‘마음’을 ‘미움’으로, ‘양심’을 ‘앙심’으로 바꾸는 것은 점 하나다. 이 점 하나가 정반대의 양극을 연결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 어찌 보면 우리 본성의 양 끝에 있는 정반대의 특성은 점 하나의 차이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가장 남보다도 못한 남이 자기 자신일 때가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가 그랬다. 자신을 위하거나 돌볼 이유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인물이 미정이다. 미정은 그에게 잘못을 고치라거나 달라지라고 강요하는 법이 없다. '남'이 아닌 '님'이 되어준 것이다.


[구씨] 오늘 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몰았다. 소몰이하듯이
[미정] (피식)
[구씨] 겨우내, 저 골방에 갇혀 마실 때... 마시다가 자려고 하면... 가운데 술병이 있는데, 그걸 (손으로 미는 시늉) 이렇게 치우고 자면 되는데, 그거 하나 저쪽으로 미는 게 귀찮아서 소주병을 가운데 알 품듯이 구부려서 자.
[미정] ...
[구씨] 그거 하나 치우는 게 ... (뭐라고 해야 되나) 내 무덤에서 내가 일어나 나와서 벌초해야 되는 것만큼, 암담한 일 같애. 누워서 소주병 보면서 그래... ‘인생 끝판에 왔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미정] ...
[구씨] 백만 년이 걸려도 못 할 것 같은 일을 오늘 해치웠다. 잠이 잘 올까, 안 올까?
[미정] ... (피식)
[구씨] ... (마시고)
[미정] ...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 어디서 어떻게 상처받고 이 동네로 와서 술만 마시는지 안 물어. 한글도 모르고 에이비씨도 모르는 인간이어도 상관없어. 술 마시지 말라는 말도 안 해. 그리고 안 잡아. 내가 다 차면 끝.
[구씨] ! (미소) 멋진데?
[미정] (미소)
[구씨] (마시려다가 문득) 추앙했다!
[미정] 좀 더 해보지. 약한 거 같은데.
[구씨] ... (멋쩍은지 외면하며 술을 마시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남다르게 신중하다. ‘사랑한다. 용서한다’와 같은 통상적인 어휘 사용을 유별나게 절제하며, 익숙하지 않은 생소한 어휘들을 등장시킨다.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추앙하라'고 하고, 밀려드는 환멸과 고통을 받아들이라는 말로는 부족해서 '환대하라'고 한다. 어색할 수도 있었던 이런 표현들이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잘 어우러지면서 시청자들의 일상에 널리 회자되었다.


미정이 구씨에게 갖는 감정 역시 연인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미정은 구씨의 주체할 수 없는 자기 환멸을 통제하거나 개조하려 들지 않는다. 그 상태 그대로여도 옆에 있겠다고 한다. 과거 무엇을 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고, 어떤 배경과 이력을 갖고 있는지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저 혼자 있게 그냥 두지 않는, 그 한 가지만 한다.


미정은 구씨라는 인간을 존재하는 그 자체로 추앙하고 환대했다. 그를 추앙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늘 인간 대 인간으로 구씨를 응원한다.

[구씨]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미정]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미정이란 인물은 자신이 지나온 긴 시간의 우울과 아픔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일 때만 타인에게 인정받고 지지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런 미정에게 추앙은 삶의 희망이었다. 미정이 구씨를 추앙할 수 있었던 건, 우울과 아픔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자신을 추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치유하러 모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 함께 한다.
- 에피쿠로스


대사 인용 출처)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대본집,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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