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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17. 2023

1억 6천만 원의 장학금을 받는다면?

인생역전 일장춘몽의 기억

나에게 1억 6천만 원의 장학금이 주어진다면 내 유학생활은 어떨까? 아니 어땠을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국내 모 장학재단의 최종면접을 보고 나온 광화문의 거리의 공기가 기억난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는 미국 유학. 애들 둘까지 데리고 가는 무거운 몸.

나에게 1억 6천만 원만 있다면 오징어게임의 성기훈 (이정재 역)처럼 달고나를 핥을 준비가 될 만큼 간절했다.


월급이 없다는 부담감은 장학금이라는 해결책(?)이 있었고 나이제한이 없는 장학금을 찾아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모 재단의 지원금. 매년 5-6명의 수여자 중 1-2명의 하버드 박사 수여생이 있었고, 심지어 작년에는 국제기구에 관심이 있다는 하버드 정치학 박사학생에게 수여를 한 것을 확인했다.


난 이미 국제기구를 10년이나 다녔고, 하고 싶은 공부도 확실해 보였고, 면접에서 할 얘기도 많았다. 게다가 한국어로 된 면접이라니. 드루와(Bring it on)! 지원서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증빙서류까지 100장이 넘는 방대한 서류를 준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원한 게 작년 4월.


5월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김형준 님 서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최종 면접은...."이라고 시작된 메시지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뭔가 먹히는 것 같았다. 확신의 게이지는 점점 올라가고 벌써 1억 6천의 장학금을 예산 파일에 기록했다. '시나리오 B예산안.'


면접 날짜로 잡힌 그날은 하필이면 미국 출국날이었다. 1억 6천의 장학금 앞에 변경 수수료는 감당해야 할 수수료 같았다. 비행기를 일주일 미루고 면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면접관들은 나에 어떤 부분에 궁금해할까를 생각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몇주를 보냈다.


면접 당일 정장을 갖추어 입고 면접장인 광화문으로 향했다. 면접장에 들어가서 등록을 하는 사인을 하니 적지만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문화상품권을 봉투에 주셨다. 쓱 보니 15명 정도의 이름이 있었고 내가 1번 타자였다. 사인을 하고 대기실에 들어오니 합격 학교와 지원자의 이름이 쓰인 명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빠른 순간에 이름과 학교 이름을 스캐닝했다. 하버드, 스탠퍼드, 코넬, MIT, UC 버클리 등 다들 명문대의 합격자였고, 15명 정도의 면접자 중 하버드는 나를 포함해서 2명이 있었다.


15명 중 5-6명 안에만 들면 되는 확률이었다. 게다가 하버드 2명을 확인한 순간 나의 교만이 올라왔다. "그래도 하버드인데.. 2명 다 되겠지?"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에 빠진 나에게 모든 확률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대기를 하는데 다른 지원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긴장도 약간 되어서 그 친구에게 어느 학교로 출국하냐며 말을 걸면서 긴장을 풀었다. 물어보니 MIT에 Finance 박사로 출국하는 인상이 좋은 남자분이셨다. 저도 보스턴으로 출국한다며 이야기를 나누며 머릿속에 또 다른 교만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파이낸스 박사를 가는 분에게 지원을 해줄까?" 파이낸스면 뭔가 재정적으로 앞길이 더 밝을 것 같은데. "Public" health인데 설마 나같이 돈과 약간 거리가 먼 공공의 이익을 위하며 하는 프로그램에 지원을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대화를 마치고 면접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면접장에 들어가니 3분의 교수님(처럼 보이시는)분들이 계셨다. 가운데는 재단의 이사님이시자 대학교수이신 분이 사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계셨고, 그 옆에는 50대 중반으로 되어 보이는 인상 좋으신 교수님과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인상이 약간 날카로운 젊은 분이 앉아계셨다.  


면접이 시작되면서 첫 번째 질문은 내 예상대로였다. "김형준 씨는 국제기구 경력도 많으시고 나이도 조금 있으신데 지금 박사를 가시려는 이유가 무엇이죠?" "네 저는..." 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대답했다. 나에게는 경험이 있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누구보다 확실하고, 가족도 있어서 재정적으로 힘들다. 모두 수긍하는 모습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셨다.


"김형준 씨는 벌써 학술지에 몇 개나 논문도 출간하시고 그러셨는데... 어떻게..?" "아 그것은 제가 협업을 통해... 가서는 제가 제대로 배워서... 제가 리드해서 하고 싶습니다." 이런 질문들이 오가며 30분을 보냈다. 국제기구에서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 답할 때는 면접관분들이 내 이야기에 진짜 관심이 있구나라는 느낌까지 받았다.


면접이 중간을 넘어갈 때쯤 인상이 약간 날카롭던 젊은 교수님이 질문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죠. 김형준 씨는 나이도 많으시고 가족도 있고, 가서 공부는 제대로 하실 수 있을까요? 힘들 것 같은데요?" 앗. 이것은 압박인가 무례함인가. 그 애매한 경계에 서있는 질문들은 계속되었다. "음... 그런가요? (시니컬)" 이런 답변들 속에 웃으며 "아 충분히 이해 갑니다. 그러나 저는..." 하며 디펜드를 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교수님은 내가 처음부터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인지 면접 내내 차가운 표정이었고, 질문도, 답변도 냉탕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훈훈하게 끝냈다. 졸업 후에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어봐서 저는 다시 국제기구로 돌아가서 리더십 자리에서 이런저런 포부가 있고, 아시아인으로, 토종 한국인으로, 우리의 장점을 살려서 새로운 리더십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 뭐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 진심이었고, 막힘없이 술술 얘기를 마치고 걸어 나왔다.


광화문 거리의 공기는 상쾌했다. 하버드를 합격할 때는 설마였다면, 장학금을 지원할 때는 설마 "안될까?"라고 내 생각은 변해있었다. 최종에 올라가서 면접까지 그럴듯하게 보고 나와 플래쳐 동기인 국태를 만나 국수 맛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시 집으로 왔다.


몇 주 후 연락이 없어 팔로우업을 해보니. 불합격이었다. 소개팅에서 분명 둘이 통한 거 같았는데 친구를 통해 들어보니 별로였다고 들었을 때의 배신감 혹은 민망함이라고나 할까나? 분명 "통하였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그 이후로 꽤나 오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나를 안 뽑아준 걸까?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을까?"


시간이 몇 달 흘러 합격자의 장학금 수여 사진을 홈페이지로 보면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Finance로 MIT박사를 가던 그 지원자분. 그리고 하버드 공대 쪽으로 박사로 진학하는 분.  내가 설마 했던 파이낸스 분이 합격을 해서 수여장을 들고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마음이 씁쓸했다. 가난한 공중보건에 더 투자하시지 ㅠㅠ 하버드 자리는 한자리였던가 ㅠㅠ  


한동안 떨어진 이유를 납득 못해서 문득문득 속상했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재정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던 자산들을 팔면서 재정적으로 끝이 보이는 이 길을 걸으려고 할 때 왜 나한테 주지 않았던 걸까 그 면접관들에게 피드백을 듣고 싶었다. 불평이 아닌. 왜 저를 뽑지 않으신 거죠?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그런 거죠? 알면 노력해서 나중에 더 잘하면 되니까.


발표가 나고 몇 달 후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나는 재단 측에 장문의 이메일로 정중하게 피드백을 요청했다. 역시나 피드백은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런 피드백 문화가 아직 정착이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피드백을 줄 만큼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 젊은 교수님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나이 40이면 벌어놓은 게 있을 텐데 장학금이 필요한가요?" 이런 취지의 질문이었다. 100% 맞는 질문이었다. 나에게는 어찌 보면 대학을 막 마친 20대 중반의 박사생보다는 벌어놓은 돈이 조금이라도 더 있겠지. 그때는 내 최선의 답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내가 "흥미로운" 지원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기회가 가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불합격의 쓰라림과 일장춘몽에서 깨고 미국에 왔다. 시간이 꽤 흐르고 우연하게도 그때 홈페이지의 작년 수혜자였던 하버드 정치학 박사 친구를 이곳에서 만나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 친구는 아마도 순수학문에 지원을 많이 해줬던 것 같다고 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박사 동생도 나보다 한해 전에 최종에 올랐는데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1억 6천만 원이라는 큰돈이 있었으면 분명히 처음부터 더 여유로운 유학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들을 더 가르쳤을지도 모르고, 외식도 더 많이 했을지도 모르고, 지금 사는 집보다 조금 더 큰 집을 렌트했을지도 모르고, 여행도 좀 여기저기 다녀오지 않았을까 싶다. 자주 가는 한국 음식점에서 그 맛있는 탕수육을 시킬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탕수육을 먹기 위해 아버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를 안 했어도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못하고, 외식도 줄이고, 여행도 예전처럼 다니지 못하고, 탕수육은 이제 뭐 잘 안 먹고, 짜장면은 짜파게티로 충분하다고 살고 있는 지금. 그렇게 초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또 살게 해 주심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항상 불편했지만 이제는 그 불편함의 크기만큼 감사함으로 채우며 살고 있다.


아마도 난 1억 6천만 원을 받지 못했기에 얻은 스토리와 그것이 없어도 살아낼 수 있다는 삶의 자신감을 얻은 게 아닐까. 앞으로도 떨어져도, 모자라도, 부족해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근육은 1억 6천만 원의 장학금보다 더 값진 자산이 아닐까 생각(이라 쓰고 위안이라 읽는다) 해본다.  


1년이 지나 장학금 지원 시기가 다시 다가오니 그때 그 광화문의 공기와, 그 교만과, 욕심이 떠오르며 부끄럽지만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것 또한 다 지나가더라는 삶의 당연한 교훈도 반추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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