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을 위해 책을 읽으면 알게 된 사실들!
나는 행복한 삶을 위해 스타트업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가치있는 일을 효율적으로 자유롭게 일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분명 불행한 순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문제는 그런 ‘순간’이 연속적이면 결국 불행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의 기본 전제는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하면 불행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더 현실적이고 본질적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불행해지는 것일까? 이 질문이 계기가 되어 읽은 책이 ‘직언’이라는 책이다.
제목: 직언
저자: 윌리엄 B.어빈
출판사: 토네이도
가난하다는 말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네카-
‘직언’은 ‘스토아 철학적인 사고를 삶에 어떻게 적용하여 살아갈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스토아 철학이 정의하는 좋은 삶이란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이란 결국 자신을 살피고 이를 통해 이성을 갖춘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이성’이라는 키워드이다. 그리고 이성의 핵심은 본능적인 욕망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을 무조건적인 ‘무소유’적 삶으로 한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무소유’적인 삶을 지향했던 이유도 결국은 본능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자신의 이성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토아적 삶이란 문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예를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호화로운 삶을 살게 되면 결국 주변 일에 호기심을 느끼며 기뻐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이들은 소소한 것을 즐거워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즐길 수 없게 된 무능함을 얻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들을 가엾게 생각한다.
성가신 사람을 대할 때 정작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실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자신의 짜증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스스로의 짜증을 다스리지 않고 계속 짜증을 낸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아우렐리우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큰 위험은 증오다. 증오는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따라서 싫은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내가 실제로 대머리인데 누군가 나를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생각해보자. 세네카는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자명한 사실을 듣는 것이 모욕인가?”
에픽테토스: “모욕적인 것은 당신을 괴롭히거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모욕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당신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화나게 하는 것은 화를 나게 한 그 원인들에 있는게 아니라, 이러한 것들에 화가 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판단에 있다.”
결국 스토아적 삶이란 이성적인 판단과 훈련으로 스스로 불행에 빠지지 않는 삶이다. 스토아적 삶에서는 월 100만원 버는 사람도 이건희 회장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스토아적 삶에서는…
현재 자신에게 돈이 없는 것을 불행해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만큼의 돈을 바라지 않으며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그것이 사라져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어서 큰 자극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기 보다는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기 위한 삶을 선택한다.
내 생각보다 스토아철학은 굉장히 매력적인 철학이었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적 삶을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1862 )의 ‘월든’이라는 책도 읽게 되었다.
데이비드 소로가 물욕·인습의 사회와 인연을 끊고, 월든의 숲속에 살면서 작성한 수필집이다. 아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스토아적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거래를 통해 삶을 이끌지 말고 놀이로써 삶을 유지하십시오.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하지 마십시오. 모험심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 자신들의 위치에 얽매여 마치 노예처럼 자신의 인생을 사고 팔며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십시오. 무역을 위해서가 아닌 사상의 소통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십시오. 모든 사람은 자기 왕국의 제왕이며 그 왕국에 비하면 러시아 황제가 다스리는 현세의 대제국은 보잘 것 없이 작은 나라, 얼음산의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합니다.
데이비드 소로는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없이 자연에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스토아적 삶에서의 행복은 결국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삶에서의 행복이 이런 철학적 사고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직업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유시민은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일이 아니라 놀이를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보다 놀이가 먼저라는 것이다.(일을 놀이만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제목: 어떻게 살 것인가
저자: 유시민
출판사: 아포리아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
유시민 작가도 자주적인 삶(자기 결정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능이 선택에 큰 역할을 한다고 언급한다. 유시민이 말하는 재능의 본질이란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도 이 말에 공감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재미있어 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랜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집중력도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물론 재미있고 가슴뛰는 일을 찾으면 가장 좋다. 그렇지만 난 개인적으로 ‘내가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좋아하면서 잘 하는 일을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다는 것은 결국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굉장히 고전적인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사실 이런 고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이 고민해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이 이런 질문에 많이 근접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제목: 니코마코스 윤리학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출판사: 돋을새김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원고를 아들 니코마코스가 정리해서 엮은 책이다.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갈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려운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시민이 언급했던 ‘행복과 일의 관계’를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래전부터 주장했었으며 자족적 특성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었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을 인간의 기능으로 표현했고 이를 다른 생명체와도 비교했다.
‘행복’이 ‘최고의 선’이다. 행복이 무엇인가를 좀 더 명료하게 알기위해 인간의 기능을 밝혀보기로 하자. 조각을 잘하는 사람,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러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선’이란 기능이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각가, 연주가가 다른 사람보다 ‘좋은, 잘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볼 때 다른 생명체보다 ‘좋은, 잘 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기능은 무엇인가? 인간이 지닌 기능은 다음의 세 가지로 첫째, 양분을 섭취하여 성장하는 삶의 기능, 둘째는 감각과 운동의 기능, 셋째는 이성적인 정신활동 기능이다. 이 중 양분을 섭취하여 성장하는 것은 식물도 그러하니 인간만이 지닌 ‘덕(우수함, 탁월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감각과 운동의 기능 역시 소나 말 등 다른 동물에게도 공통적인 것이므로 역시 제외한다. 결국 남는 것은 이성적인 정신활동 기능인데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비교했을 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덕’이다.
행복은 자족적이다. 행복은 본인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하게 좋은 선은 자족적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최고의 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삶이다.
인간만이 가진 우수한 기능이 이성적 원리를 따르거나 이성적 원리를 내포하는 정신의 활동이므로, 우수한(탁월한) 인간의 기능이란 바로 이러한 이성적인 활동이나 행위를 ‘우수하게’ 실제 활동으로 드러내어 이를 잘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인간으로서 ‘선’이란 ‘우수하게’ 이성적인 정신의 활동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스토아철학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 물론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과 분명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성으로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은 결국 본인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행복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분명 비슷한 면이 있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이 행복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키워드가 있다.
이성적, 자주적 이라는 표현들이다.
스토아철학에서는 불행이 나를 파괴하지 않도록 이성적인 사고를 연습해야 한다고 했고
유시민 작가는 행복한 삶은 자족적인 삶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자족적이며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했다.
결국 행복이란 본인 스스로의 이성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실수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큰 실수일수록 그것은 당연한 것을 모르는 것 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것은 우리들의 큰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모르는 것 처럼 살고 있는 실수 말이다.
상대방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해봐야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
화를 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를 내는 것.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상대에게 매달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달리는 것.
그 외 여러가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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