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 그리고 거짓
인간의 삶에는 변함없이 거짓이 함께 한다. 거짓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은폐하여 체제의 통제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선의의 거짓말로 인간관계에 평화를 주기도 한다. 거짓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따라다녔는데 그것치곤 세상이 거짓을 바라보는 태도가 일단 부정적이다. 칸트조차 거짓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므로 언제나 잘못이라고 말했다. 보편적으로 거짓이 배척당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의 존재감은 보편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은 사실과 진실, 거짓의 실타래다. 여기서 거짓은 사실과 진실을 분별하는 잣대다. 흥미로운 점은 사실이 거짓일 때 혹은 진실이 거짓일 때 대중의 반응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사실이 틀리다'라는 거짓이 드러났을 때 사회의 반응은 신뢰도 하락, 신빙성 감소 정도로 일반화가 가능하다. '흐리고 한때 비'가 물폭탄이 되는 거듭된 오보와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중률은 기상청을 오보청으로 만들었다. 결국 국민들은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은 기상청의 예보를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게 됐다. 지난해 심각했던 미세먼지 상황에도 기상청의 측정치를 못 믿겠다며 해외 측정 애플리케이션 붐이 일었던 것과 일맥상통하다. 반면 '진실이 아니다'라는 거짓이 드러났을 때 사회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진실이 아닌 거짓을 발표함으로써 맞는 후폭풍은 대체로 '어찌 그럴 수 있는가'와 같이 민감하고 감정이 담긴 반응이다. 세월호 사고 당시 정부의 늑장대응의 실체가 알려졌을 때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는 절규와 절박한 물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거짓된 사실과 거짓된 진실이 만들어 내는 반응이 다른 이유는 두 개념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옳고 그름이 부재한 객관적 현상의 집합체다. 가공되지 않은 정보의 파편이다. 한편 진실은 그 자체가 의미로써 기능한다. 진실에는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다. 주체자가 현시점에서 사실 중에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선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본질의 차이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저널리즘의 의무와도 밀접하다. 수많은 사실 조각 중에서 기자가 선택해 고른 이 조각은 지금 이 순간 그의 기준에서 판단한 최선의 결론이다. 그것이 진실이 돼 기사로 나온다. 사실은 계속해서 생기고 그만큼 판단해야 할 진실도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계속해서 판단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물론 과정 속에 불순물처럼 낀 거짓을 제거하는 단계는 기본이다.
과정이 축적되면서 기자는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진실은 신기루다. 최종 목표를 진실로 상정하고 그것에 근접해질 뿐, 도달했다 싶으면 실체가 없다. 절대적이지 않은 진실의 속성 때문이다. 거짓된 진실에 대중이 주관적으로 반응하고 기자가 판단한 진실이 최종이 아닌 최선의 진실이라는 상황이 이를 증명한다.
작금의 저널리즘이 경계해야 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언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완벽한 진실' 철학에 매몰된 기자의 오만이다. 기자는 내 기사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정보도, 반론보도는 기자의 자존심을 긁는 일이 아니다. 언론 불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언론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
사실을 거짓이라 부르고, 거짓이 진실인 척하는 작금일수록 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는 언론에게 사실의 조각만을 보여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조각을 맞춰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시민들이 여전히 저널리즘에 거는 기대치다. 저널리즘학의 대부 빌 코바치가 기자를 '의미부여자'라 칭한 이유를 떠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