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수두라고요?
조금 과장을 보태어 내일모레 40을 앞둔 내가,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여실히 느끼던 어느 날.
(물론 이런 생각이 최근에서야 든 것은 아니다.)
퇴근 후 샤워 하다 몸에 붉은 반점이 잔뜩 올라와 있는 걸 발견했다.
크게 놀란 건 아니었다.
얜 또 뭐야? 정도랄까.
그저 내 일상에 찾아온 작은 불청객 정도의 느낌이었다.
별건 아니겠지 싶어도 워킹맘의 몸은 본인만의 것이 아니므로(아이와 회사와 가정에 나눠주면 내 몫은 한 20%쯤 되는 듯하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병원을 찾았다.
인자한 미소를 띤 연세 지긋한 선생님이 이리저리 보더니 내게 내려준 진단은 “장미색 비강진”이라고 한다.
네, 별거 아니에요.
한 5-6년 전에도 앓았던 적 있어요.
약 잘 먹고 잘 바르면 자연히 낫더라고요.
가렵지도 않고 아무 느낌도 없어요.
그저 피부 감기 같은 거래요.
회사 사람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는데.
갑자기 등허리가 따끔거리고 아프기 시작하는 거다.
내가 앓았던 장미색 비강진은 이렇지 않았는데.
더듬더듬 만져도 보고 어렵게 손목을 이리저리 꺾어
사진도 찍어보고 하니 뾰루지처럼 볼록 올라왔다.
어려울 때 찾는 내 친구 챗GPT에게 열심히 물어보니,
이건 장미색 비강진의 증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섰다.
다음날 다시 병원에 찾아가 등허리를 보여주니.
수두랜다.
네???
저는 어릴 때 수두에 걸린 적도 있고,
더 어릴 땐 엄마가 예방접종도 맞혔을걸요?
그리고 이 나이에요?? 대상 포진이 아니고요?
대상포진은 신경을 따라 몸 한쪽으로만 나는데
나는 양쪽으로 다 나있어서 수두가 맞다고 한다.
그리고 장미색비강진은 사실 한번 걸리면 다시 안 걸린다고..
제가 몇 년 전에 앓았었다고 했잖아요.. 슨생님...
저는 32개월 남자아이가 있어요.
옮기진 않을까요??
백신을 맞혔으면 괜찮을 거랜다.
나도 백신 맞았는데 걸렸잖아요.. 슨생님...
어제 이 수포가 생긴 걸 보여줬으면 바로 수두인걸 알았을 거라는데, 신기하게도 병원을 나서고부터 기분 나쁘게 찌릿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전날 쓸데없이 진료와 처방에 200불을 지불하고, 맞지 않는 약을 먹고 바르고, 다시 500불이 넘는 돈을 쓰고 나왔다.
전염성이 있으니 회사를 쉬는 게 좋겠다고 한다.
특히 임산부한테 옮기면 안 된다는데.
회사에 7월 출산을 앞둔 임산부 직원과, 또 다른 예비 아빠인 직원이 떠오른다.
바로 사무실에 들러 자리를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하고, 진단서를 스캔해서 병가를 올리고 나왔다.
최근 아이가 한 달 넘게 연달아 두 번 아팠었다.
아이가 아플 땐 병 수발로, 아이가 다 낫고 나면 아이한테 옮아서 그렇게 나 역시 한 달 넘게 병을 달고 살았더랬다.
면역시스템이 고장이 난 탓이겠지, 씁쓸하면서도 모처럼 얻은 휴식이 반갑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오늘.
아이를 어린이집에, 남편도 회사에 보내고 혼자 조용한 집에 남아 약을 먹기 위해 평소에 먹지 않던 아침을 차려 먹으니 우리 집이 낯설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좋다..!
이 집에서 이렇게 혼자 아침 먹는 거 처음이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이런 기분이 좋아서
갑자기 무언가 새로운 걸 막 하고 싶고.
그러다 친구가 예전에 글을 써보라고 추천해 주었던
어플이 생각났다.
주변에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손을 내저으며 글은 무슨 글이냐고 했었는데.
그런 재주도 없고,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 누가 내 글을 읽는 게 부끄럽다고.
그런데 문득 오늘 그래보고 싶은 거다.
바게트? 브레드? 도저히 못 찾겠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브런치란다..
글 쓰는 걸 친구에게 들키기 싫어 혼자 찾아보려 했는데 검색하니 온통 브런치 맛집만 나오길래 이 이름이 아닌 줄 알았다.
어플을 깔고 프로필 사진을 바꾸려 보니
사진첩이 온통 아이 사진에, 일하며 찍은 서류 사진, 그리고 어쩌다 찍은 음식사진뿐이다.
내 삶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며칠 뒤 다시 회사에 출근하면 이런 글 쓰는 시간조차 사치처럼 느껴져 금세 그만둘지 모르지만,
또 어쩌면 내가 내 삶 속에서 나를 찾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
사람 일은 모르니까.
내가 이 나이에 수두에 걸릴지 몰랐던 것처럼.
시작은 이렇게 뜬금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