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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Mar 19. 2023

여우는 간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마 전 심조원 작가의 책 <우렁이 각시는 당신이 그런 아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북토크에 참여했다. 작가는 옛날이야기를 자기만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대화 주제는 옛날이야기 중에서도 '여우 누이'로 흘러갔다.


옛날 어느 큰 부자 부부가 살고 있었다. 곳간에는 쌀이 넘쳤고 아들을 셋이나 두었다. 마구간엔 튼튼한 준마들도 매어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들 부부는 풍요가 아닌 결핍에서 행복의 열쇠를 찾았다. "딸이 있어야만 해." 그래서 삼신할미에게 간절히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딸만 주신다면 아들도 필요 없고, 불여우라도 좋으니 보내주세요." 기도가 들어졌는지 너무나도 예쁜 딸이 태어났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딸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5살 무렵. 그때부터 마구간의 말이 한 마리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우 누이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저는 제가 여우일까 봐 무서웠어요."


작가는 어릴 적에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여우라는 동물에 덧씌워진 불온하고 교활한 이미지를 자연스레 배웠다. 그래서 여우 같은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자기 몸가짐을 검열해야 했다.


"저 년이 집안을 망칠 거야."라는 할머니들의 말에 담긴 부정적인 뉘앙스. (물론 작가와 나의 세대는 달라서인지 우리 집 할머니들은 그런 말을 하진 않았다.) '저 여우 같은 것'이라는 시선에서 풍기는 무서운 성적인 에너지.


물론 나는 작가와 똑같은 경험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도 여우처럼 남자를 꼬신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서 움츠러들었. 나는 이렇게 착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사람들 말마따나 여우가 되어 손바닥에 참기름을 쫙쫙 발라  궁둥이에 손을  넣고 간을 빼먹는 무서운 여자가 될까 . 아니지.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운 여자가 되는 것은 괜찮다. 진짜 두려웠던 것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것 , 남자애들한테 꼬리치고 약아빠지게 행동하는  ."


내게도 그런 순간이 생각난다. 같은 반 남자애들이 불편해진 것을 넘어서서 불쾌한 가해자로 보였던 순간.


11살 때, 같은 교실의 별 볼 일 없는 남자애들 무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은 나와 1학년 때부터 놀이터에서 종종 어울려 놀았던 친근하고 토실토실한 남자애였다. 그 녀석이 내게 말을 걸었다. "쟤가 너랑 자고 싶대." 걔가 턱끝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평소 어리바리하긴 해도 말짱하게 보였던 남자애가 느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만약에 그런 말을 학교의 멋지고 인기 많은 남자애가 했더라면, 그것까진 아니더라도 그 녀석들 티셔츠 카라에 땟국물이 묻어있지 않아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덜 상처받았을까?


선생님들은 늘 피곤해 보이거나 무관심하거나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저들을 혼내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교실의 누군가는 여자애들 탓을 돌렸다. "야하게 생겨서 그래." 나 자신조차도 그런 말을 한 녀석들을 탓하기는커녕 나를 탓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내 얼굴의 무엇이 그런 불쾌한 말을 듣게 만들었을까 점검해야 했다. 그래서 거울을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을 연습했다. 제발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길 바랐다. 동시에, 멋지고 말끔한 남자애들만큼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 두 마음 사이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부터 등하교 길에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학교 애들이 내 뒤통수를 잡아채거나 내 목을 조르며 공사장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는 놀이터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더는 저녁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집에 일찍 들어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차츰 말수와 명랑함과 사람을 향한 신뢰를 잃어가던 11살의 어린 나를 떠올리면 꼭 안아주고 싶어 진다. 강한 힘을 불어넣어 주고 싶어 진다. 그리고 그 어린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텐데.


여우는 사실 무서운 동물이 아니야.

사람을 해치지 않고 민가 가까이에 살아.

여우가 먹는 가장 큰 짐승은 쥐일 뿐이야.

눈웃음이 예쁜 데다 가끔 공중돌기를 하기 때문에 신기하고 요망해 보이긴 했겠지.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무섭고 폭발적인 힘을 가진 불여우가 되어보자.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에 흔들릴 것 없어. 불여우가 원하는 건 남자를 꼬시는 게 아니야. 남자 천 명의 간이 아니야. 아빠의 마구간과 권력과 세계를 갖고 싶은 거야.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남의 눈을 즐겁게 해 주면 그만인 '고명' 딸 대접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네가 원하는 걸 잘 생각해 봐.

'여자는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 한계를 두지 말고. 이 옛이야기를 통해 더욱더 강해지고 자유로워지면 돼.


스무 살이 되자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 옛날 느끼한 눈빛을 보내던 녀석은 내 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문자를 보냈다. "우리 사귈래?" 지질하기는 여전했다. '아니, 너와는 같은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아. 나는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많아서. 아마 너는 꿈도 못 꿀 세상이겠지만.' 마음속으로 그들 모두와 작별했다. 해코지를 당할까 봐 여전히 걱정하는 내가 슬펐지만 어쨌거나 정중하게 거절의 문자를 보낸 뒤, 차단 버튼을 누르고 해방감을 느끼며 대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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