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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Apr 10. 2020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돈을 잘 버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무엇인 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모든 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1. 백수 생활을 한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가장 크고 무거운 단점, 고정 급여가 없다는 것ㅡ아, 살이 찐다거나 최대 사나흘 동안 말 한마디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도ㅡ만 제외하면 꽤나 이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잠을 많이 자서인지 피부가 좋아지고, 듣기 싫은 뒷담화를 억지로 듣고 있지 않아도 되고,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새벽 두 시에 펼 수 있는 자유도 생기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마음 편히 시작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취미가 특기가 될 만큼의 투자를 할 수도 있고, 하다 보면 잡기술이 늘어 왠지 나도 요즘 유행하는 N잡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차기도 하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지기도 한다. 각종 시사에 밝아지며 스포티파이, 넷플릭스에 지불하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느낌을 처음 느끼는 영광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중에 정말 최고로 좋은 건 내가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맥주다. 오전 11시에 발코니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평소보다 크게 틀어놓고 냉동실에 얼려놓았던 남은 치킨윙 네 조각과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여유라니.. 북유럽 사람들이 부럽지 않은 최고의 호사를 누리고 있자니 작금의 상황에 있어서 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방역으로 칭찬을 받고 있는 싱가포르에 거주 중인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체계를 갖춘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점은 나에게 꽤 큰 안정감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단연 인생에 몇 없을 것만 같은 오후다. 



2. 사실 어제는 잠이 한숨도 오지 않아 밤을 꼴딱 새웠다. 영어로 된 에세이를 두세 개 쓰고, 한글로도 하나 쓰고, 내일은 무엇을 써볼까 구상을 하며 1시 이전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배가 어찌나 고프던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먹방을 보다가, 문득 이틀 전에 꾼 전 남자 친구 생각을 시작으로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떴다, 메모를 적었다, 지웠다 하다 보니 어느새 동이 튼 것이다. 새벽 네 시 즈음 이후 처음 시간을 제대로 확인한 게 오전 6시 48분. 지금 잠에 들면 하루를 완전히 망칠 것 같아 750 여 미터 떨어진 마트로 향했다. 


전국의 모든 식당에 Dine-in을 제한하고, 모든 문화·예술 활동을 금지하고, 야외에서의 모든 네트워킹 활동과 더불어 대가족이 모이는 가족행사 마저 금지한다고 발표한 싱가포르 정부 덕에 모든 식재료가 채워지는 족족 'panic buying'으로 사라져 가는 시기라 그런지 직원들은 벌써부터 등에 땀이 잔뜩 맺혀있었고, 사람들은 진열되기가 무섭게 물건을 채갔다. 10개들이 계란이 못해도 세 판 씩은 든 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나 '허니, 당신은 우유 다섯 개 가져와. 나는 야채 챙길게. 여기서 만나'라며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부부도 봤고, 판다가 그려져 있는 굴소스를 여섯 개나 사가는 아저씨도 봤다. 마치 내일은 아무런 식자재가 싱가포르에 공급이 되지 않는 것처럼.



3. 아, 이게 바로 전형적인 싱가포르의 kiasu-ism. 살짝 씁쓸해졌다. Kiasu라는 건 싱가포르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느낀 싱가포리언들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데 중국어로는 驚输, 구글에 검색했을 때 나오는 사전적 의미는 'Having a grasping or selfish attitude arising from a fear of missing out on something.' 


이는 서울보다 조금 더 큰, 인구는 서울의 절반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나라가 국민소득 6만 불을 달성하기까지 싱가포르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경쟁, 도태, 쟁취의 역사로 인한 것인 데다 아직도 초등학교 때의 성적으로 중, 고등학교가 판가름이 나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중학교 성적까지 제출해야 하는 '빡쎈' 싱가포르에서는 도저히 없애려야 없앨 수 없는, 우리로 치면 빨리빨리와 같은 급의 단어이다. 싱가포르 그 자체. 누구 하나 굳이 부정하지 않는 싱가포리안 고유의 특성.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크게 펴기를 시작했다. 하루가 달라짐을 느낀다.


불안을 견디는 방법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물집은 다행히 한 번도 잡히지 않았는데 오른쪽 발톱은 한 번 빠진 적이 있다. 걷고 나서 2-3주 정도 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속적으로 자극이 얼마나, 어떻게 갔는지는 잘 모를 정도로 크게 아프진 않았는데 어느 날 보니 발톱이 덜렁덜렁거리고 있었다. 굳이 뜯어내는 게 무서워 나름 아프지 않게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새 발톱이 나오면서 기존의 발톱을 밀어낸 것이다. 이미 내 발톱이 아니었던 것이 붙어있을 때는 괜히 찌릿 아프기도 하고, 불편하고, 신경이 쓰였는데 자연스럽게 빠진 이후로는 전혀 통증이 없었다. 심지어 새로 나오는 발톱은 빠르고 건강하게 자라났다. 젤 페디를 한 것을 제때 떼지 않아 층이 분리되고 거칠어진 기존의 발톱 대신 깨끗하고 윤기가 나는 발톱이 자라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젠가 끝날 것이다. 바이러스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판데믹'이라는 단어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통장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기간 또한 언제는 저물 것이다. 그 액수가 적던지, 많던지 간에 언젠가는ㅡ머지않아ㅡ 끝날 것이다. 싱가포르에서의 생활도 끝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누구보다 싱가포르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날들 또한 흐려지고 '언니, 요즘은 싱가포르 안 그래요.'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것, 느끼는 것, 보는 것들에는 모두 끝이 있다.



"그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라고 생각하니 뻔하디 뻔하게도 "지금은 살아야 한다"라는 결론이 스쳤다. 지겹도록 보고, 듣고, 안다고 생각했던 문장이다. 과거를 사는 것이 아닌,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닌 바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 지금을 느끼는 것.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는 것. 이 것이 내가 불안한 백수 생활을 견디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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