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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PI May 12. 2022

유리구슬


딱히 자랑은 아니지만

유난히 어린 시절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치아 관리를 제대로 하라는 당부를 들어왔는데

그 덕분인지 나는 지금까지 치과에 가본 적이 단 한 번 밖에 없다.

유치 발치를 위해서 갔던 것이다.


오른쪽 어금니로 기억되는데,

혀로 밀면 뿌리가 드러날 정도로 빠져있었지만

손으로 그것을 뜯어내기에는 겁이 났다.


나의 경우 그때까지 거의 모든 유치들은 자연스레 흔들리기 시작해서

혀로 몇 번 밀어내면 가려움이 가시듯 통쾌하게 뽑혔는데

웬일인지 오른쪽 어금니만은 더 이상 후퇴할 곳 없는 전선의 군인들처럼 총력을 다해 버티는 것이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아무튼 치과에서 발치를 하기 위해 조명 아래에 입을 벌리고 시술대에 누워 있는데

치과 의사가 설압자로 내 입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다른 의사들을 모조리 데려왔다.

의사들은 진기하고 신통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이 한 명씩 번갈아가며 내 입속을 들여다봤다.


"너 어느 초등학교에 다니니?" 의사가 물었다.

나는 그렇게 유치 발치를 마치고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건치아동 대회에 선발되어 금상을 받았다.

노력하지 않고 받아낸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상이 었다.

상금은 당시 50만 원 정도로 나는 상장과 메달, 흰 봉투에 담긴 만 원권 50장을 들고 집으로 당당히 귀가했다.

짜릿한 경험이다.

무언가 집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귀가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되고 기쁜 일인지

나는 이 일을 통해 배운 것이다.

내가 소년기에 경험한 아주 귀중한 사건 중 하나다.


그래서 나에게 치과란 곳은 아주 유익한 곳으로 인식되었지만

보편적으로 치과란 공포스럽고 생각만으로 고통스러운 꺼려지는 곳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치통으로 인한 두통과 턱관절 장애, 수백만 원은 우습게 나오는 진료비 등에 대해서

쉽게 전해 듣는다.

강인해 보이는 사람도 치과라면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사정하듯 이야기하지만

경험이 전무후무한 나로서는 '아, 그거 참 안됐네.' , '곤란하겠네.' 할 뿐이다.


상금 50만 원을 쥐고 집으로 가던 날

나는 나에게도 타고난 것이 있으며, 그것이 치아라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게으른 나도 역시 치아에 관해서라면 자려고 누웠다가도 일어나

불상을 닦듯 조심스럽게 이를 닦아냈다.

(가능하다면 모조리 뽑아서 세면대에 담가 두고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닦아내고 싶다.)

신체 중 가장 아끼는 부위가 있다면 나는 치아일 것이다.


소중한 것을 더 소중하게 살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겠지만

요는 소중해서 소중하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살피면 어느 것이든 소중해진다는 것이다.


언젠가 차 안에서 수십 줄로 금이 난 내 아이폰을 보고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편이 좋겠어.' 하고 J 양이 말했다.

응? 나는 내 아이폰을 소중하게 생각한단다. 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수십 줄(어쩌면 수백 줄)로 금이 난 아이폰을 보면 뻔뻔한 나 역시 딱히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J 양과 대화할 때 특히 말 문이 막힐 때가 종종 생긴다.)


얼마 뒤 급하게 돈을 벌기 위해 과외로 배달 일을 했다.

늦가을 형광색 안전조끼를 입고 스쿠터로 서울 곳곳을 다니며 배달을 다녔는데

스쿠터 시동을 끄고 거치대에서 아이폰을 빼다가 그만 땅으로 떨어뜨려버렸다.

수십 줄 난 금을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아이폰이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내가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사실 대부분 업신여기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잃고 나서야 깨닫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그 후로 조금 어리숙하지만 '물건을 소중히 하자.'는 생애 첫 생활신조를 세워보았다.


처음에는 작심삼일이었지만 무슨 일이든 항상성이 작용하지 않는가 위로하며

물건을 소중히 여기자를 컴퓨터에도 거울에도 새 아이폰에도 붙여두고 틈 나는 대로 마음속으로 외웠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행동은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소화도 안 되는 ‘물건을 소중히’ 6자를 꾸역꾸역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항상 곁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있는 것들은 업신여기기 쉽다.

그것들은 대체적으로 곁을 떠나면 상당히 위태로워지는 것들이다.

아이폰이 그렇고 치아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내 주변을 의식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버릇으로 그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단 언사에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예전보다는 느리지만 확실히 실수가 줄고 신중한 쪽으로 변한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내 주위의 것들이 진심으로 특별하고 귀중하게 느껴진다.

만족이라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고마운 마음이 들고 넉넉한 마음이 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와 직업, 물건들은 모두 하나같이 인연 따라 생긴 귀중한 것들이다.

인연이란 바람처럼 서쪽으로 와서 동쪽으로 간다.

찰나의 시간이다.

그 잠깐의 시간이 아쉽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다.


인간은 30세 전후로 우선순위가 있는 인간과 우선순위가 없는 인간으로 나뉜다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다.

우선순위라는 것은 다시 말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순위가 있는 사람은 줏대가 있다.

감언이설에 끌려 샛길로 가지 않는다. 위험이 도사리는 지름길도 내키지 않는다.

그냥 자기 길을 간다. 나답게 산다는 말이다.


바쁜 현대사회에 뒤섞여 살다보년 마음 안팎으로 소란스러워진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즉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판단력이 흐려진다.

흐린 판단력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라도 하면 마음은 더 급해진다.

더 흐려진 판단과 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악순환이다.

그 사이에 자기에게 주어졌던 소중한 인연들까지도 잃어버린다.

이것은 모두 나의 이야기다.

남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우선순위가 생기고 신중해지며

줏대가 생기고 만족하고 감사하게 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유리구슬은 아이폰에 5년간 저장된 J 양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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