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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Oct 19. 2016

잡다한 생각

글 하나 쓸 거리는 안되는 자투리 생각들

1. 창 밖에 비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보면서 반으로 잘린 아보카도를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문득 한국보다 아보카도가 싸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케냐에 있을 때 북쪽의 우림 지역으로 놀러 갔더니 아보카도 나무가 집집마다 다 있던 것이 생각났다. 놀러갔던 집의 인심 좋은 케냐 아줌마는 나이로비로 돌아가는 나에게 자기네 집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아보카도 나무에 달린 아보카도들을 커다란 비닐봉지 한가득 담아 주셨었다. 아보카도는 너무 맛있다. 아보카도가 싸고 많이 나는 곳에서 살아야겠다. 


2. 와인의 나라 프랑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주류에 관한 규제가 가장 많기로 유명하다. 1989년부터 재정된 Loi Evin (에방 법)은 텔레비전, 라디오 등의 각종 언론 매체에서의 주류에 관한 언급 및 광고를 전면 금지하고 있어서 우리 나라에서처럼 텔레비전을 보다가 맥주 광고를 보고 맥주가 먹고 싶어질 일은 없다. 이 법 때문에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무심결에 티비나 인터뷰에서 와인 이야기를 했다가 소송에 걸린 적도 많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인스타그램에 루이즈 들라쥬 (Louise Delage)라는 20대 여성의 계정이 화재가 됐었다. 만들어지자마자 몇 달만에 팔로워가 수 만명이 생긴 이 여자는 알고보니 프랑스 정부에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었고, 몇 만명의 사람들이 하트를 누른 루이즈의 사진은 하나도 빠짐없이 술과 함께 한 사진들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음주 행위에 노출되어 있고, 그 노출에 무뎌져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캠페인이었단다. 우리 나라는 맥주 회사의 TV, 라디오, 지면 광고는 물론이고 심지어 혼자 술먹는 문화를 조장하는 드라마까지 있는걸 생각하면 두 나라의 상반된 입장이 꽤 도드라진다. 물론 이 법은 꽤 허술하게 지켜지고 있고 프랑스 사람들은 여전히 와인을 끼고 살지만 알콜 규제 법들이 제정된 이후로 총 알콜 소비량은 십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전반적인 추세는 감소하고 있지만 십대 청소년들과 이십대 학생들의 과도한 음주(Binge Drinking)는 증가하고 있긴하다. 프랑스 정부는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 문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OECD에서는 최근 전세계 음주 실태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소득/고학력 젊은 여성들의 빈번하고 과도한 음주라고 지적했다. 이 두 문제의 교집합은 바로 나.


3. 최근 두달 사이 내년 결혼 발표를 한 사람만 주변에 다섯이다. 방금도 친한 언니의 결혼 발표를 들었다. 그저께는 내년 여름에 결혼하는 같은 석사 과정 친구가 드레스를 고르는데 따라가 달라고 해서 수업을 마치고 쇼룸에 같이 다녀왔다. 친구는 10벌이 넘는 드레스를 입느라 지쳤지만 구경하는 나는 신이 났다. 언제 시집갈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지 말고 결혼한다고 뻥치고 이런 쇼룸에 와서 드레스를 한번 입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나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어린데 5년 사귄 남자친구랑 결혼을 한다. 남자가 엔지니어라 구직에 크게 제한이 없어 결혼하면 친구가 원하는대로 호주에 가서 살겠다고 한다. 어제 옆자리에 앉은 남아공 여자애는 아예 대놓고 수업시간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다이아를 남아공에서 직접 사서 커팅할 예정이란다. 반지는 보통 남자가 사주는거지만 자기는 평생 낄 반지 자기가 직접 고를거라고 미리 이야기를 했단다. 다들 뭐 신났다. 


4. 장학금을 주는 프랑스 외교부에서 내가 듣는 파리시 문화센터 프랑스어 수업 비용도 환불을 해준다고 한다. 환불을 받으려면 프랑스 수업을 듣는 동기에 대한 에세이(Lettre de Motivation)을 영수증과 같이 제출하라는데, 영어로 써야하나 불어로 써야하나.


5. 일주일에 두번 저녁마다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러 가려면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우리 건물에서 나와서 벤자민 퐁당이 걸었던 길을 걸어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을 지나고, 판테온과 생쟝뷔예브(Saint Genevieve) 성당을 지나서 에펠탑과 룩셈부르그 공원을 마주하며 걸어 소르본 대학을 지나면 수업을 하는 학교에 도착한다. 수업을 마치고 그 길을 다시 돌아 올 때 마다 새삼 내가 파리에 사는구나 감탄하게 된다. 흰 석회 벽에 부서져서 길에 흩뿌려지는 노란 가로등 불빛들이 참 예쁘다. 계획대로라면 파리에 있을 날도 몇 달 남지 않았다. 졸업하면 어디서 뭐해야할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6. 오늘은 아파서 학교를 안갔다.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들이 한달 전부터 하나씩 독한 몸살 감기에 걸리더니 나는 거의 막차를 타고 어제서야 증상이 왔다. 나는 편도선이 커서 아프지 않을 때에도 입을 아 하고 벌리면 목구멍을 반 이상 가린 편도선이 보일 정도인데, 그래서 몸이 조금만 안좋아도 편도선이 제일 먼저 부어서 말썽이다. 어렸을 때 편도선 수술을 하라고 의사가 이야기했다는데, 왜 안했을까. 어제는 아파서 일찍 열한시 전에 잠들었다가 새벽 한시에 깨고 말았다. 어렸을 때 부터 잠이 많지 않고, 낮잠도 자지 않는 나였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2시 취침 6시 기상의 기숙사 생활을 하다보니 없던 잠이 더 없어졌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하루에 최대 7시간 이상 자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수면량도 절대 보존되는 탓에 일찍 자면 새벽에 깬다. 어제는 한시부터 다섯시까지 깨어있다가 뒤늦게야 잠이 들어 일곱시에 일어났다. 몸은 좀 나아졌지만 더러운 지하철타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오늘은 결석하고 집에서 빨래도 하고, 프랑스어 숙제도 하고 든든하게 밥도 챙겨 먹었다. 여담으로 아프지 않아도 평소에 내가 잠이 많이 없고, 얕은 잠을 자는데다 종종 잠을 못자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 것을 의사인 친구 하나가 불안장애(Anxiety)인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정신병자가 나라니, 좀 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수긍하기로 했다. 여담으로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불안장애 진단을 받으면 의료용 마리화나를 합법적으로 구매/소지/소비할 수 있다. 


7. 아픈 김에 햇살이 좋아 생전 안자던 낮잠을 한번 자보려고 했다. 갑자기 옛날 대학가요제에서 권성연이라는 사람이 부른 "한여름밤의 꿈"이라는 노래에 꽂혀서 그 노래를 유튜브에 틀어놓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이 들지 않아서 한 이십분을 누워서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었다. 유튜브는 노래가 끝나면 자기가 생각하기에 비슷한 다른 노래로 자동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게 처음에는 괜찮다고 한 네다섯다리 건너고 나니 엠씨더맥스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번 엠씨더맥스가 나오니까 그 다음도, 그 다음 다음도 계속 엠씨더맥스만 나왔다. 편안하게 낮잠자고 싶은 그 상황에서 딱 듣기 싫은 장르의 노래였지만 침대에서 책상까지 세발자국 움직이기가 싫어 한 다섯곡을 연달아 듣다가 결국 낮잠을 포기하고 노래를 꺼버렸다. 유튜브의 의식의 흐름은 나랑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나 평소에 공부할 때나 아침에 일어나서 나갈 준비할 때 유튜브에서 노래 엄청 자주 찾아 듣는데, 그런거 쿠키로 기억해서 내 취향대로 음악 갈아태워주는 알고리즘 유튜브에서 개발해줬으면 좋겠다. 옛날 노래 좀 들었다고 엠씨더맥스를 틀어주다니.


8. 얼마전에 누가 파리에서 살아서 좋은 점 3개와 나쁜 점 3개를 이야기해보라고 했는데, 나쁜점은 (1) 지하철이 미친듯이 더러운 것, (2) 행정 처리에 전산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점, (3) 만 26세 이상의 학생이라 학생 할인은 다 못받는데 돈도 못 벌어 서러운 점 이렇게 세가지인 것 같다. 여기선 거의 모든 학생 할인이 만 25세 까지라 나는 그 혜택을 딱 2달 받았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작년보다 부쩍 돈 쓸일이 많아진 요즘들어 더더욱 예전 월급받던 시절이 너무 그립다. 좋은 점은 그거 빼고 전부 다. 이렇게 좋은데 좋아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이걸 함께 할 수 없는 것도 나쁜 점이다. 돈 벌면서 파리에서 연애하면서 살면 진짜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OECD에 누가 나 취직시켜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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