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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예슬 May 31. 2017

아홉 번째 엄마 기일 날에





벌써 그렇게 됐나, 싶다가도

처음부터 엄마가 없었던 듯 엄마를 보고, 만지고, 함께 웃었던 기억들이

흐릿해져 가는 것이 싫어 오랜만에 뭐라도 좀 끄적이고 싶어졌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엄마는 뽀뽀를 해주거나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대신

회초리와 벌로 사랑을 표현하셨고, 어린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열한살 적의 겨울,

포항 큰집에 다녀오라고 해서 한달 동안 사촌들과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속을 썩이는 내 앞에서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 던진 엄마, 그 길고 풍성했던 머리카락을 잃어버린 채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던 엄마의 모습은 태어난 이래로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 후로 무섭고 강인했던 엄마는 한없이 연약해져만 갔고,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슬프고 싫었다.


6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때에,

장미꽃 다섯 송이를 들고 학교에 찾아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던 엄마의 모습과.

사춘기가 심했던 중학교 2학년, 컨닝을 하다가 걸린 나를 대신하여 교장실로 불려 간 엄마의 모습.

그렇게 철 없이 상처만 안겨 드린 나 때문인지 엄마의 병은 재발에 재발을 거듭하였다. 고등학생이 되고 다행히 조금은 철이 든 나는 공부할 책을 들고 엄마와 함께 병원에 다니며 세상 가장 친한 친구 처럼 그간 쉽게 나누지 못 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언제나 차가운 엄마의 손발을 꼭꼭 주물러드리며 노래를 불러드렸다. 


쓰러지시기 전날,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앙상해진 몸으로 내게 기대어 집앞 산책길을 함께 걸었던 날.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엄마가 우리 예슬이 사랑하는 거 알지? 엄만 예슬이 밖에 없어' 라고.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엄마가 내게 전해주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를 지금 꺼내 놓았구나, 하는 직감을 인정하기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히 툴툴거렸다. 늦잠을 자버린 다음 날 아침, 학교 버스를 놓치게 생겨 여느 아침 처럼 안방에 들러 엄마 손 잡고 다녀오겠다 인사를 하곤 급히 나가려는데, 엄마가 평소와 달리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엄마 손에 그렇게 힘이 들어간 것을 참 오랜만에 느꼈던 것 같다. 나는 학교에 가서 전화 하겠다고 애써 손을 빼내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고, 그 날 담임 선생님으로 부터 엄마가 쓰러졌다는 이야길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엔 동네 고양이가 갓난 아기 처럼 스산하고 불길하게도 울어댔고, 그 후로 아빠는 고양이를 싫어한다. 아빠는 수술실로 가셨고,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동생을 바라보며 홀로 남은 시간. 내가 자고 일어나면 엄마의 머리를 가르는 무서운 수술이 끝나있을 것이고, 어느 쪽이든 결과가 나올 거라는 생각에 날밤을 지새웠었다.


수술은 잘 됐고 큰 고비를 넘겼지만 엄마는 의식을 찾지 못 했고, 나는 방과후 매일 같이 병원을 찾았다. 내가 누굴 대신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꿔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 어린 나이에 처음 했었다. 아무런 의학적 지식도 없으면서 침대 맡에 달린 엄마 혈압과 맥박수를 들여다보며 매일 같이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한 일상을 2주 정도 보낸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오늘밤은 별 일 없을 듯 하니 들어가 잠 좀 자라고 하셨고. 간만에 푹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벽에 엄마가 하늘로 갔다고. 눈물도 나지 않는 멍한 상태로 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던 택시 안, 비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다 우선 제일 친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친구는 믿을 수 없었는지 믿기 싫었던 건지 '만우절이라고 거짓말 하는거지?' 물어왔고, 그 때부터 나는 정신을 잃고 울기 시작했다. 다행히 당시 나에겐 힘이 되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 중 한 친구의 말.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을 너가 조금 먼저 겪은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이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후로 엄마는 유독 내 꿈을 많이 찾는다. 3년 전 쯤엔가 태풍이 심하게 온 적이 있었다. 캄캄해진 집에서 혼자 베란다에 신문지를 붙이다가 거실에서 잠깐 잠이 들었고, 그대로 꾼 꿈에서 예전 모습 그대로 엄마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순간 이게 꿈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소중한 시간을 허무하게 보낼 수 없어 다급히 엄마에게 지금 나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었다. 쓰러지던 날 아침, 그리고 세상을 떠나던 날 새벽 곁을 지키지 못 했던 나에게 엄마가 전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이제라도 전해 듣고 싶었다. 뭐야, 하며 어색하게 웃어 넘기려는 엄마에게 지금 이건 다 꿈이라고. 깨고 나면 엄마는 또 사라져 버릴거고 그럼 나는 미칠 것만 같다고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엄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입을 떼었다, 붙였다, 하시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꼭 안아준 채로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음성으로 전해듣진 못 했지만 그 눈물로 엄마가 하고팠던 이야기를 너무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우릴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웠을까. 그렇게 얼마 간을 꼭 부둥켜 안고 울다가 꿈에서 깼고, 늘 그랬듯 엄마는 사라져 버렸지만 엄마가 여전히 내 안에 있음을 안다.


엄마 기일 쯤이 되면 늘 비가 내린다. 엄마는 체내 수분이 늘 말라 있었기에 비가 오는 날을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 나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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