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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충형 요정 Jan 30. 2023

드라마 <대행사>를 보니 피가 끓는다

나도 한때는 말이야

잘 나가는 광고인을 꿈꿨다. 잘 나간다는 말은 무엇으로 치환될까 싶지만, 당시에는 성공의 척도는 잦은 이직이었고 이는 곧 연봉의 상승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분명 어딘가에서는 내가 가진 능력을 사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 믿었고, 그러한 믿음으로 살았다. 밤을 새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즐거운 일이었다. 당연히 일에 치이면 별의별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근본적으로 업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장애물은 아니었다. 광고 업무는 분명 고객의 무언가를 세일즈 하기 위해 펼치는 커뮤니케이션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능력을 세일즈 하는 기회였다.


JTB드라마 <대행사>를 챙겨본다. 아주 드물게 드라마를 챙겨보는데, 이 드라마가 그러하다. 드라마의 내용대로 광고회사는 크게 기획팀과 제작팀으로 나뉜다.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기획과 제작이 따로 움직인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재 대행사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실감 넘치는 고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기획팀이었다. 통상 AE라고 불리는 Account Executive, 즉 광고주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기획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광고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선언과도 같은 직무 명명법이다.


당연히 광고 제작물은 제작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 기획은 광고주에 대한 이해와 관계를 바탕으로 방향에 대한 가이드를 잡아가고, 제작은 광고주의 목표를 이루어줄 메시지와 광고의 콘셉트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등을 만들어간다. 보통 광고의 꽃은 AE라고도 하지만 결국 광고를 '와우' 소리 나게 만들어 내는 능력은 제작에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과정에서 기획은 광고주와 제작 사이를 오가며 외줄을 타는 곡예사가 되고는 한다. 광고주가 원하는 방향을 제작이 충분히 구현해 주길 독려하고, 제작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을 광고주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한다. 때로는 각각의 입장이 너무 치열해서 새우등이 터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앞에서 밝혔듯 나는 기획이다. 내가 일하던 대행사는 한 층에는 제작이 다른 층에는 기획이 상주했다. 기획이 머무는 층은 비교적 워라밸이 지켜지는 편이었지만 제작이 머무는 층은 그렇지 않았다. 밤을 새기가 일쑤였고 주말 근무는 당연했다. 당시 광고 초짜였던 나는 기획이지만 제작과 일했다. 무슨 말이냐면 광고주 관리, 여기에 Account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유는 당연히 정산 관리가 따른다. 각종 세금계산서를 다루고 입금 내역과 비용 지출을 관리하며 해당 프로젝트로 얻은 실재 수익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다. 수시로 광고주를 방문하고 여러 채널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한다. AE의 업무를 하면서 제작의 업무에도 깊이 참여했다. 나의 기획 사수는 너무 제작팀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말고 일찍 퇴근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막 광고에 불이 붙기 시작한 나는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너무도 재밌었다.


제작팀과 함께 밤을 새우며 콘셉트를 도출하고 메시지를 만들고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찾는 과정, 잦은 회의와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거치며 점점 진정한 광고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크리에티브한 기획이 되고 싶었다는 설명이 어울렸지만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기획력 있는 제작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밤낮없이 주말 없이 제작과 동고동락하던 기획의 AE는 1년 6개월 만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광고일을 시작하면서 혼자 세웠던 계획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다만 대행사는 아니었고 마케팅 컨설팅을 전문하는 회사였기에 새로운 경험은 더 높은(?) 대행사로 이동하기 위한 좋은 교두보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당연히 모든 근무 조건은 이전보다 모든 것이 두 배씩은 좋아졌다. 특히 연봉이 그러했다. 광고 업무를 통해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증명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마케팅 컨설팅을 주 업무로 했고, 그중에서도 농수산물을 전문으로 했기에 우리의 클라이언트는 전국에 있었다. 주로 시/군 단위 혹은 지역 농협 단위의 농산물 브랜드의 마케팅을 담당했다. 각각의 브랜드 제품이 가진 시장성을 분석해서 어느 시장으로 판로를 개척하는 게 가장 효율적 일지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내겐 생소한 분야였기에 초반 어려움이 컸다. 오래지 않아 퇴사를 고려하기도 했다. 조금만 참고 일을 좀 더 배워보라는 대표의 만류에 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B2B와 B2C의 개념으로 시장을 보기 시작하면서 마케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나의 업무는 소비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대행사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 무언가였다.


대행사에 사활을 걸 것 같았던 나의 업무 이력은 고작 1년 6개월이었지만 마케팅 회사에서는 무려 3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른 글에서 밝혔지만 이때쯤 나는 가슴에 묵혀뒀던 세계여행을 떠났다. 5년여를 일했는데 그것보다 더 긴 5년 5개월을 여행했다. 돌아와서는 여행 가이드 일을 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도보 여행을 했다. 텐트를 지고 편의 시설 없는 외딴 길을 떠나는 새로운 여행 방식에 빠졌다. 요즘은 새로운 여행에 대해 준비 중이다. 일단은 지난해부터 시작한 마라톤에 열중하고 있다. 3월 19일에 열리는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에 신청했다. 목표대로 결승선을 통과한다면 4월에는 더 먼 곳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드라마 <대행사>를 시청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내 가슴을 불태웠던 현장 속으로 잠시 다녀온다. 지금의 내 여행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혼자서 진행한다. 그럴 때마다 팀원들의 존재가 그립곤 하다. 드라마는 내가 가장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들을 보여주지만, 앞으로의 내 삶에서 또 한 번 저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회의하고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기에 가슴이 끓어오르고, 아니리면 아니라서 가슴이 끓어오른다. 적어도 한때 나의 전부인 것 같았던 광고가 더 이상 내 삶의 가장 큰 조각이 아니라는 일종의 상실감은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가슴에 불을 지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다시 뜨거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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