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성
누구나 펼치기 어려운 페이지(page) 하나쯤은 갖고 있다. 환한 기억들로 가득해서 그 ‘빛’을 아껴두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기억의 무게 때문이거나 너무 많은 이야기가 쌓여버려 펼칠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페이지 말이다. 은총 같은 시간이 내가 가진 깜냥의 너머로부터 오지만 늘 곁에서 나를 굳건히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처럼 빌려 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늘 갚아야 할 것이 쌓이는 것이 관계의 신비이자 이치라면 ‘빛’과 ‘빚’은 단지 글자만 닮은 게 아닐 것이다. ‘펼치기 어려운 페이지’란 빛과 빚이 겹쳐 있는 관계의 이력을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하다. 미세한 진동으로 다가왔지만 피뢰침을 쥐고 있던 것처럼 언제라도 나를 뒤흔들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기대감을 갖게 했던, 그러나 어느 순간 고요하게 사라져버린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내게 빛이자 빚과 같은 장소다. 오랫동안 미루어두었기에 펼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 페이지, 나는 지금 그 페이지를 가까스로 펼쳐 두고 한 귀퉁이에 몇 마디의 말을 적어두려고 한다. 언젠가 붙여두었던 기억의 포스트잇을 더듬어가면서 말이다.
대안(alternative)이란 말을 부적처럼 품고 다니던 시절, 상환 날짜를 잊고서 백지수표처럼 그 말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당도하게 된 ‘생각다방 산책극장’은 곳곳이 ‘이미’ 열린 상태여서 좀처럼 안으로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다. 새로운 장소에 입회하거나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뭔가를 돌파하거나, 극복하거나, 협의하거나, 하다못해 다짐하는 정도의 결의가 필요했는데 그곳은 어디에도 자물쇠가 없었고 ‘대안’이라는 입장료 또한 요구하지 않았다. ‘지역의 가능성’이라던가 ‘대안적 삶의 양식’이란 어구를 만능 열쇠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대의’를 찾을 수 없는 그곳을 외려 난해하게 느끼고 있었다. 누구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문턱을 없애버린 곳이 역설적으로 처음 만나는 문턱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생각다방 산책극장’을 ‘생각극장 산책다방’이라고 잘못 불러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 또한 글자 하나하나 뿐만 아니라 한획에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미를 찾으려고 집중하고 있던 당시의 내겐 꽤나 충격적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마치 외국인들처럼 얼굴이 잘 구분이 되지 않기도 했다. 실제로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만났던 많은 이들은 한국이라는 국가를, 혹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외국인처럼 체류하고 있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동네 친구들이 모이는 다방 같았고, 때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립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되기도 했고, 곳곳의 여행자들이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였다가, 종종 공연장으로 바뀌었던 그 장소의 변화무쌍함은 뭐든 꽉 죄지 않고 느슨하게 풀어두는 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않았을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머물렀지만 20-30대의 비중이 도드라졌다는 점을 환기해본다면 ‘생각다방 산책극장’의 정서적 BGM이 ‘여유’였다는 것은 얼핏 ‘헬조선’이 도래하기 전에 허락된 마지막 풍요의 혜택을 누렸던 현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유’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였으며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잊고 있던 ‘살림의 목록’임을 ‘생각다방 산책극장’이 내내 증명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마치 여유가 일상의 리듬인 듯, 이후에도 줄곧 여유라는 플로우(flow)를 타면서 살아갈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내는 스웩(swag)이 아니라 ‘생활에서 나오는 바이브(vibe)’의 멋스러움으로 흘러넘치는 듯 보였다. 분명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흘러나오는 비트(beat)가 있었고 그 비트를 감응할 수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장소가 만들어내는 비트 위에서 각자의 라임(rhyme)을 짜며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읊조리지 않았던가.
빈티지(vintage) 하고 미니멀(minimal)한 그곳을 누군가는 ‘힙’한 장소로 경험했겠지만 비어 있어 채우는 기쁨도 컸던 그곳이 누군가에겐 ‘대피소’이기도 했을 테다. 2013년의 어느 여름 날 ‘생각다방 산책극장’이 대연동 시절을 ‘유쾌하게’ 마감하기 위해 활짝 열었던 문으로 생활예술모임 ‘곳간’의 첫 번째 문도 열었던 그때, 나는 ‘가장자리’, ‘폐허’, ‘재(능)개발’과 같은 어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서로의 손이 늘 마주보던 그곳에선 뒷짐을 지거나 호주머니에 손을 감추는 사람은 없었다. 생활 속에서 익힌 저마다의 재주가 손바닥 위에서 춤추었고 각자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곳은 어디든 환하게 빛났다. 손이라는 등대가, 손이라는 촛불이 그곳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등불 아래서 서로의 손을 마주하던 시간. 수년 간 그곳을 왕래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피소’라는 글자가 손바닥에 새겨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생활글을 써서 나누던 어떤 자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누구라도 무너지고 쓰러질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절실한 것은 미래나 희망이 아니라 ‘오늘을 지켜줄 수 있는 대피소’다. 대피소에선 사소하고 별볼 일 없어보이는 것이 사람을 살리고 구한다. 한 잔의 물, 한 마디의 말, 몸을 덮어줄 한 장의 담요, 어느 날 마침내 우연히 하게 되는 각자의 이야기 한 토막, 소중 했던 기억 한 자락. 기어이 대피소에 당도한 빈자들은 그제서야 마음 놓고 몸을 벌벌 떨 수있다. 벌벌 떨리는 몸이 곧 진정되리라는 것에 안심하면서 ‘회복’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예감하고 예비하게 된다. 회복은 과거를 지우거나 부정하지 않고도 오늘을 마주할 수 있게 하며,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해도 미래를 향해 기꺼이 손을 뻗고 발돋음할 수 있게 하는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지고 있는 힘이다. 대피소의 희미한 불빛은 회복하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의 몸(flesh)을 부대끼고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발열에 가깝다. 세상의 모든 대피소는 오늘의 폐허를 뚫고 나아갈 수 있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도착해 있는 ‘회복하는 세계’를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한다. 어둡기만 했던 시절동안 ‘생각다방 산책극장’이 내내 비추었던 ‘길’을 따라 걸었던 걸음과 그 걸음들이 쌓여 만들어갔던 길. 누구도 가지 않아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없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한 시절에 감사하고 더 이상 함께 걸을 수 없는 그 길의 사라짐을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