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
생각다방에 처음 갔던 날을 떠올린다. 부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처음이었을 때, 흔들흔들하는 마음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코끼리유치원 정류장에 내려 컴퓨터세탁소를 지나 주택이 모여있는 길로 들어서서 연한 주홍빛 담과 닫혀 있는 문을 보고 아 잘못왔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8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지나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째였는데, 부산에는 아버지와 할머니 이외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내가 아시안이고 퀴어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지나치게 두드러지고 때로는 한없이 작아졌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주목받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건 편리했지만 동시에 한없이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구직사이트와 블로그를 넘나들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너무 길었고 감정은 널뛰기를 했다. 그러다, 지푸라기 잡기 식의 웹서핑 끝에 다방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가 닿은 다방 블로그를 읽으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여기에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고 했는데. 여긴 누가 사는 집인 것 같고. 문이 닫혀 있다는 건 들어갈 수 없다는 걸까. 하지만 담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나는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냈다. 저기요. 계세요?
처음에는 충분히 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여러 번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끄집어낸 후에야 안에 있던 혜정씨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때 나는 초여름의 날씨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가장 좋아하는 하늘색 긴팔 셔츠를 입고 약간 땀을 흘리고 있었다. 혜정씨는 설거지를 마저 하고 일정이 있어 밖으로 나섰고, 히요씨는 부엌 식탁에서 나의 어색한 질문에 귀기울이고 대답해 주었다. 백수에요, 라는 말을 누구 앞에서 해본 적이 몇 번 안 되던 때였다.
전시는 원래 예약을 하고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히요씨는 클래식 라디오를 틀고 나를 다락으로 안내해주었다. 히요씨의 20대와 다방의 지난 몇 년간 기록이 포개진 자리. 벽에 붙어 있는 비행기표와 사진, 프로젝터에서 흘러나오는 파도와 걸어가는 발, 책상 위의 포스터와 책, 천 주머니, 편지. 전시를 꾸리게 된 배경을 담은 히요씨와 이내씨의 대화록은 작은 책상 위에서 나중에야 발견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라는 말 없이, 그저 자신의 리듬으로 펼쳐진 그 작은 우주에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다락에서 부스럭거리던 두 세시간 동안 봄과 폴이는 한 켠에서 낮잠을 잤고 이날 나는 처음으로 부산에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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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는 가족관계 안의 ‘호영이’나 미국에서의 ‘jodie’가 아닌 ‘호영씨’, 라고 불리는 생활을 시작했다.다방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그것이 기본소득에 대한 다큐멘터리 상영회이든, 된장찌개를 만드는 과정도 춤이되는 즉흥무용장이든, 기타 선율과 비트가 울려퍼지는 홈콘서트이든, 늘 한 사람씩 자신을 소개하고 내키는 만큼 목소리를 내는 시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따뜻한 응시가 있어서 나는 나의 울퉁불퉁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응답해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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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부산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바바씨에 따르면,
“すごく覚えてるのは、ほよんさんがタバンを知ってすごく嬉しそうに話してくれたこと。それを聞いて、私もプサンに行くことが楽しみになったこと。”
: 정말 기억에 남는 건, 호영씨가 다방을 알게 되고 나서 너무너무 기뻐하면서 이야기해주었던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도 부산에 가는 게 기대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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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을 알게 되고 나서는 다방에 놀러가고 다방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자꾸자꾸 찾았다. 그 중 하나가 히요씨가 가르치는 일본어 공부 모임이었다. 건형씨, 소라씨, 동림씨,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의 학생과 히요씨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부엌 식탁에서, 또는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더듬더듬 새로운 말을 연습했다. 하루는 수업을 가는 길에 소라씨를 마주쳐서 같이 걸어갔는데, 그 날 소라씨에게 두근두근한 소식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 오 하다가 다방에 도착했고,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히요씨, 혜정씨, 건형씨가 소라씨를 둘러싸고 식탁에 앉았다. 소라씨는 다시, 좀 더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열띤 공기, 모두가 상체를 소라씨를 향해 반쯤 기울인 듯한 느낌, 깔깔 웃고 한마디씩 보태던 모습- 그 여름날 풍경이 엽서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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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동 다방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방에 살던 네 사람은 하나둘 새로운 공간을 찾아서 은수 언니가 있는 산복도로로 이사했다. 나와 바바씨는 다방 친구들을 따라 같은 동네에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사를 준비하면서 주인집과의 트러블이 생겼다.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방법을 몰라 괴로워하던 나에게, 바바씨는 어디 도움을 구할 곳은 없냐고 물어보면서 “친해서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도와달라고 하면서 친해지는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나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히요씨에게 얼른 전화를 했다. 그때 히요씨가 공유해 준 경험담과 조언도 도움이 되었지만, 목소리를 듣는 게 얼마나 안도감을 주던지! 나는 그때 이사한 집에 지금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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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나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방의 물리적 공간은 해체되었지만, 다방 사람들은 그래도 서로 산책 삼아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집을 구했고, 우리는 이삿날마다 산복도로의 구불구불한 골목과 긴 계단에서 릴레이 선수단처럼 짐을 옮겼다. 그리고 몇 차례의 집들이를 했다. 그 다음은 은수언니의 까페를 중심으로한 반상회. 간장과 된장 만들기, 매실 담그기, 대망의 김장을 마치고 반상회는 흩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오면서 관계들도 여러 방식으로 변화했다. 반상회를 마무리하게 된 이유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전에는 나에게 꿈처럼 반짝이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곳이었던 다방을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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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다방의 대문 앞에서 서성이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지금도 종종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없이 미끄러지는 기분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다방이라는 공간의 기억과 다방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지도가 알려주는 건, 관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단편적이지 않다는 것. 과거가 멀게 느껴지더라도 내가 스스로 그걸 저버리지 않는 이상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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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엽서:
다방에 두 번째로 들렸던 날. 3주년 모임에서 동그랗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때, 거실에 머무르던 햇볕 해질녘 즈음 이내씨 그리고 Hien과 걸어오른 초록 언덕 앞서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 웃음소리, 말소리 저편에 보이던 어떤 성곽, 이름 모를 주황색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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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저런 다방 엽서들을 가슴 안주머니에 담고, 다방 친구들과 또 다른 기억들을 만들며 지내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각자 그리고 함께 무언가의 한복판에서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나에게 다방의 기억들, 다방 친구들이 가까이서나 멀리에서나 힘이 되어 주는 것처럼, 우리가 이 계절을 건강하고 자기답게, 울퉁불퉁하고 여리고 그늘진 면들을 놓지 않고 바라보면서 지나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