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징느 Feb 22. 2024

천사의 시

하늘과 나무와 눈과 시

출근길. 집에서 역까지는 600미터 정도가 된다. 역까지는 10분 정도 걷고, 지하철을 타고 40분 정도 가서 다시 5분 정도 걸으면 회사에 도착한다.


 지하철에 타서는 보통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나 뉴스기사를 보기 시작하기 때문에, 맨 귀로 주변의 소리를 듣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시간은 역까지 걷는 10분 정도이다. 어떤 날은 아침에 되어서야 지는 노랗고 둥근달을 보면서 ‘너는 이제야 지는구나, 나는 이제 일을 하러 간다’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곧 우리 꼬꼬가 이 길을 걸어 학교를 가겠구나’ 하기도 한다. 매체의 방해 없이 생각만으로 채우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오늘 아침에는 바닥이 아주 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질척하게 녹아버린 눈을 밟고 나오는데 조금 짜증이 났다. 콧물이 나기 시작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구두에 물이 들어가서 스타킹이 젖으면 어쩌지. 비는 살짝이라도 파여 있는 곳이 있으면 그리로 모여들어 웅덩이를 이루고 나머지 땅들은 그래도 밟을 만 한데, 녹은 눈은 그렇지도 않아서 여기저기가 함정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발가락 앞부분이 축축한 느낌이 든다, 에이 망했다.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쭉 걸으려고 방향을 바꿔 보도블록을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길이 깨끗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길 위에 늘어져 있는 나무들이 눈을 받아주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나무가 예쁘다는 생각은 종종 했는데, 나무들이 든든하게 눈을 막아주었다. 길을 감싸듯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보도블록 끄트머리에만 눈이 약간 떨어져 있었다.


 아주 옛날에 가수 양파가 부른 ‘천사의 시’라는 노래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 들었던 것 같은데(찾아보니 96년 12월에 나온 노래다, 세상에), 가사뿐 아니라 곡이 아주 아름답다. 옛날 노래를 즐겨 듣지도 않고 근래 그 노래를 들을 일도 없었는데, 오늘 아침 깨끗한 길과 길을 감싸는 하얀 나무를 보는 순간 갑자기 그 노래가 생각이 났다.


천사의 시(1996.12.1)


가수: 양파

작곡, 편곡: 김덕윤

작사: 김용호


많이 지쳐있는지 어두워 보여요
삶이 그댈 또다시 속이려 하나요
언제나 그댈 위로할 순 없지만
내게 기대어 쉴 수 있도록
Forever with you
난 작고 약하지만 남은 힘이라도
모든 걸 주고 싶어
Forever with you
난 변한 게 없는데
항상 그 자리에 가까이 곁에 있어
 
아직 모르겠나요

그대 작은 삶이 얼마나
고마운 나의 행복인지
아주 작은 것도 그댈 닮은 내가
느낄 수 있음을 소중한 만큼
Forever with you
난 작고 약하지만 남은 힘이라도
모든 걸 주고 싶어
Forever with you
난 변한 게 없는데


 나무가 나를 위해서만 눈을 막아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날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그냥 행복했다. 나무가 감싼 보도블록을 벗어나자 다시 질척한 길이 시작되었는데도 더 이상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발가락은 무사했다.




작가의 이전글 너를 만날 수 없다면 엄마는 과거로 가지도 않았을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