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6
"자,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식 술게임을 시작해볼까요?"
윤지는 신이 난 듯 손뼉을 치며 와인 병을 흔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윤지가 주도하고 있었다.
나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게 윤지의 계획이었구나.
처음부터,
아예 도망칠 틈도 주지 않으려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곧장 윤지가 내게 술잔을 들이밀었다.
"보라야, 너 먼저 마셔!"
"윤지야, 나 그냥 천천히 마실게."
"천천히 마시면 재미없지! 우리 술게임 하기로 했잖아?"
윤지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티보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티보는 자연스럽게 레오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나는 슬쩍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조용했고,
술잔을 들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눈빛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마주친 시선을 돌렸다.
"자! 게임 시작!"
윤지가 먼저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다들 가볍게 웃으며 술을 한두 잔씩 마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술잔이 점점 더 자주 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술이 자꾸 목으로 넘어갔다.
나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마시다 보니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점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특히, 레오와의 거리감이.
어느 순간, 나는 무심코
레오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말이 없었다.
게임에도 크게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씩 술을 마시면서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레오 씨, 술 좀 더 마셔요!"
윤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레오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보라 씨도요."
그 한 마디에,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는 가볍게 술을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도망쳐 봐. 그래도 결국 신경 쓰일 거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감추려
얼른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보라야, 너 얼굴 엄청 빨개졌어!"
윤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았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이 분위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레오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
그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게 신경 쓰였다.
'이건, 술 때문이야.'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손끝을 꼭 쥐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안 돼!"
윤지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제 시작인데!"
그리고,
그녀는 티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야, 오늘 보라랑 레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레오는 이미 알고 있는듯 했다.
나는 당황하며 윤지를 바라보았다.
"아니, 윤지야. 나는 괜찮아. 집에 갈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너 완전 취했어! 지금 나가면 큰일 난다고."
"나 안 취했어!"
"거짓말하지 마. 얼굴 빨개진 거 봐!"
윤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티보에게 끄덕였다.
"자기야, 그치?"
티보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보라, 그냥 자고 가. 우리 방 많아."
나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보라 씨."
낮고 차분한 목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묘하게 깊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레오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윤지가 이 분위기를 만들려 했다는 것도,
내가 도망치려 한다는 것도.
그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그냥 여기서 쉬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위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낯선 온기였다.
몸이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술기운 때문인가?
아니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내 앞에는 레오의 얼굴이 있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의 팔이 느슨하게 나를 감싸고 있는 걸 깨달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야."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술자리에서,
윤지가 분위기를 주도했고,
나는 경계했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 술잔이 계속 오갔다.
✅ 머리가 어지러웠다.
✅ 집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윤지가 강하게 붙잡았다.
✅ 레오가 옆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괜찮아요. 그냥 여기서 쉬어요.'
그 순간이 떠오르자,
나는 다시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표정.
마치, 이 모든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최대한 조용히.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몸을 일으켜 앉은 순간,
레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얼어붙었다.
또다시, 그와 마주친 시선.
그것도 이렇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보라 씨."
그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급하게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내가 너무 취했었나 봐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냥, 술김에…"
"……"
"어쨌든, 미안해요. 이건 실수였어요."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실수다.
어제는 단순한 술자리였고, 나는 잠깐 흐트러졌을 뿐이다.
그렇게 선을 그어야만 했다.
하지만, 레오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런 말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얼굴.
그가 조용히 물었다.
"보라 씨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숨을 삼켰다.
"네."
"그래요."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어쩐지…
이해한다는 듯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황급히 방을 나섰다.
그리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윤지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잘 잤어?"
나는 말이 막혔다.
"……윤지야."
"응?"
"너 일부러 그랬지?"
윤지는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뭐가?"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젠 확실했다.
윤지는 어젯밤부터 모든 걸 계획했던 거다.
그녀의 의도대로,
나는 도망치지 못했고,
레오와의 거리는 확실하게 변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조용히, 방에서 나오는 레오를 흘끗 바라봤다.
그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마치, 이제는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
나는 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