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5
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라] – 알겠어. 토요일 저녁 7시지?
기어코 승낙하게 만들었다.
이제 남은 건…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다른 한 사람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나] – 레오, 토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 티보도 같이 있어.
[레오] – 갑자기요?
[나] – 그러니까 더 와야지.
그의 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레오도, 보라도 올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을 닫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마음이 아직 열려 있다는 걸.
보라는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한다는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보라가 스스로를 속이며,
기어코 "괜찮아." 라고 되뇌는 모습을.
그녀는 스위스에서 혼자였다.
마틴과 이혼을 결정한 후,
아이들을 위해 이곳에 남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 자신을 위한 선택은 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
그건 그녀에게 사치였고,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
보라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있을 뿐,
이미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다.
윤지의 초대는 갑작스러웠다.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 티보가 스테이크 해준대."
나는 핸드폰을 들고, 망설였다.
윤지는 스위스에서 내가 가장 의지하는 친구였고,
그녀가 가끔 이렇게 초대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레오도 올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순간적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윤지] – 토요일 저녁 7시야. 알겠지? 거절하면 내내 괴롭혀 줄 거야.
손끝이 잠시 머뭇거렸다.
거절해야 했다.
아무래도 이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보라] – 알겠어.
메시지를 보내고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별일 없을 거야. 그냥 식사 자리일 뿐이야.'
하지만, 나는 그날 밤의 끝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초대가 불편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윤지는 절대 단순한 식사 자리로 나를 부르지 않았다는걸.
그녀는 항상 뭔가를 엮어보려 했고,
이런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레오가 있었다.
그 사람.
며칠 전에도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최대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레오 씨, 저 남자 만날 생각 없어요."
하지만…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다에요?"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의 목소리.
나는 이 관계가 깊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하고 있었고,
회사에서도 그와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데…
윤지가 주최한 자리에서,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내가 애써 쌓아올린 벽이,
무너져버리면 어쩌지?
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쩌면, 내가 이 초대를 거절하지 못한 건
윤지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할지,
아니, 사실은—
그를 보고 싶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다.
[보라] – 토요일 저녁 7시지?
이미 늦었다.
나는 이 만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피하고 싶은 건 만남 자체가 아니라, 내 감정일지도 몰랐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보라] – 토요일 저녁 7시지?
드디어, 넘어왔어.
나는 티보가 부엌에서 와인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혼자 피식 웃었다.
그가 내 표정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 좋아?"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아주 중요한 작전이 성공했거든."
티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또 보라한테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능청스럽게 와인 한 병을 꺼내며 말했다.
"아무것도. 그냥… 그녀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만들려고."
티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윤지야, 네 친구를 레오랑 엮으려는 거면 둘이 자연스럽게 놔두는게 좋지 않아?"
나는 팔짱을 끼고 티보를 바라봤다.
"내가 둘이 엮는 게 아니지, 보라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데.
그런데 혼자서 자꾸 아닌 척하고 도망가려고 하잖아.
그럴 거면, 내가 한 발 도와줘야지. 난 보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티보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술까지 마시게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럴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보라가 끝까지 딱딱하게 굴 걸?.
적어도 토요일 저녁만큼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게 둬야 해."
티보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어. 하지만 이후 벌어질 일들은 네가 책임져."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토요일 저녁.
나는 티보와 함께 와인을 준비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분위기 좋아질 것 같지 않아?”
티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윤지야, 너 뭐 꾸미고 있어?"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그냥 좋은 저녁 식사 자리가 될 거야.”
그리고, 문이 울렸다.
첫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나는 문을 열며 활짝 웃었다.
"보라야! 어서 와!"
그녀는 코트를 벗으며 조용히 웃었다.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어색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무언가 의심스러운 분위기라는 것을.
하지만, 아직 그녀는 모른다.
이제 곧, 그녀가 도망칠 곳이 없어진다는 걸.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침 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레오.
그의 시선이 보라를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오늘 밤, 무언가가 달라질 것이다.
윤지의 집은 늘 따뜻했다.
늘 다정한 그들 부부처럼.
거실 한편에는 로맨틱한 촛불 장식이 켜져 있었고,
창밖으로는 밤이 고요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와, 진짜 맛있다!"
나는 윤지가 건네준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물며 감탄했다.
윤지는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주 오라고~!"
그때,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오에게 향했다.
그는 어색한 듯, 티보와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윤지가 말을 걸어도,
딱딱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태도로 대답할 뿐이었다.
'불편한 걸까?'
나는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윤지는 그럴수록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말했다.
"보라야, 요즘 여행 생각 없지?"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행?"
"응! 예전에 우리 같이 떠났던 그때처럼!
그때 네가 얼마나 설렜는지 알아? 완전 다른 사람이었어."
윤지는 내 손을 잡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옛날 생각.
그때 나는 여행을 하며 자유를 느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있어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젠 그런 거 못 해."
윤지가 내 표정을 읽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야. 넌 아직도 여행을 좋아해."
나는 반박하려 했지만, 그 순간 레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마치, 내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
나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식사가 끝나고,
윤지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술을 꺼내놓았다.
"자, 이제 진짜 재미있어질 시간이야."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불안해졌다.
"뭐 하려는 거야?"
윤지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식 술게임! 티보도 알아야지!"
그리고, 순식간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윤지는 룰을 설명하며, 일부러 레오를 참여시키려 했다.
"자, 레오! 이거 해봐! 이게 한국 스타일이야."
나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술을 마셨다.
게임에 열중하는 윤지와 티보, 그리고 억지로 참여하고 있는 레오.
'이렇게 어색할 줄 알았으면 안 왔어야 했는데…'
나는 조용히 술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술을 계속 마시다 보니, 점점 몸이 나른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분위기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레오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술을 한 잔 더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