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매출 20억을 넘기며

현실은 꿈을 살해한다

by 안재원

스타트업을 시작할 즈음 내게 그것은, 스티브 잡스의 PPT가 떠오르는, 낭만 그 자체였다.


서른 초반에 월 매출 5억을 넘겼다. 순수익은 월 2억. 서른 중반엔 연 매출 100억을 넘겼다. 대학 동기들이 사원일 때 난 대표이사가 되어 있었다.


직장 경험도, 집에 돈이 많던 것도 아닌 27살 미대 졸업생이 연대보증 딸린 은행 대출금으로 그 어려운 걸 해냈었다. 대기업에서 에이스 출신들도 소리 없이 망하는 창업 통에서.


나는 사랑과 돈에 결핍이 있었고, 그건 내게 초인적인 열정을 줬다. 경영은 몰랐어도, 위대한 제품을 꿈꾸고, 디자인을 사랑했었다. 정말 많이 연구하고 치열하게 몰입했었다.


데이팅 앱 매칭 알고리즘을 위해 페이스북 뉴스피드 알고리즘을 뜯어 데이팅 앱에 맞게 설계하고 구현해 냈었다. 변리 비용을 아끼려 직접 특허 및 상표를 출원했었고, 세무 비용을 아끼려 직접 부가세 환급을 처리했었다.


실리콘밸리 페이스북 & 구글 출신 인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고 배우려 자문으로 뒀었다. 화도 많이 내었다. 어설픈 제품 기능과 콘텐츠들에. 팀원들은 가끔 울기도 했다. 어설픈 것들에 대한 타협이 충돌보다 싫었다.


그리고 2025년, 월 매출은 20억이 넘었고, 순이익도 20%가 넘는다. 연 매출은 대략 250억 원. 돈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회사에 부채도, 이상한 사람도 없고 경영권도 탄탄하다. 클리셰 같지만 진짜 ‘열정’ 하나로 시작해 이루어 냈다.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그 열정이 있을까?

글쎄. 역대 최고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출근이 그리 즐겁진 않다.


매주 월요일은 최소 4회의 미팅 있다. 출근하면 주간 데이터를 살피고 리더 회의를 한다. 팀별 목표치와 주간 프로젝트에 대해 피드백한다. 큰 재미는 없다. 회의들이 끝나면 대략 오후 5시. 몸은 이미 지쳐 있다.


매주 팀 리더들과 1on1 미팅을 하며, 목표 달성 현황에 대해 보고 받고 피드백한다. 성장에 문제 될 만한 중요한 지점을 콕 집긴 하지만, 안 한다고 아주 큰 일이 나진 않는다.

화요일엔 대행사 미팅, 목요일엔 디자인 미팅, 금요일엔 또 주간 미팅이 있다. 면접을 포함해 많으면 주 20회 미팅을 한다.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가 있다.


업무 중간엔 컨펌 요청을 받는다. 급여 지급이 맞는지, 투자자의 이사회 소집 내용이 맞는지, 월 결산 내용이 맞는지, 마케팅 캠페인 예산이 타당한지, 취업 박람회 예산이 적절한지, 수습 통과 내용이 적절한지 확인하고,


노무 처리를 이렇게 하라, 세금은, 회계 이슈는 이렇게 처리하라, 채용 여부와 오퍼 금액은 이렇게 하라, 디자인 매칭 선호 설정, 익명 게시판 닉네임 정책은 이렇게 하라, 사내 유동자산은 이렇게 운용하라 결정한다.


나머지 많은 시간은 채용에 쓰인다.

매주 50개의 이력서를 살피고, 3번의 면접을 본다.


서류 면접은 본인이 얼마나 근속이 짧은지, 얼마나 블러프를 잘 치는지 뽐내는 공간이다. ‘총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2년 근속한 사람을 찾기 드물다(총괄이라는 단어를 쓰면 장기근속이 불가한 법이라도 있는 듯하다).

A/B 테스트 2~3번 하면 ‘데이터를 잘 읽는’ 타이틀이 붙고, 매출이 5만 원에서 15만 원이 되면, ‘300% 성장시킨’ 타이틀이 붙는다(물론 회사는 적자다).


대면 면접은 주로 함께 어떤 전략을 만들어갈지 즐거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이 사람이 어디가 모자란 지, 얼마나 본인을 과대평가하고 있는지, 나중에 잡플래닛에 이상한 글을 쓸지 검증하는 것에 가깝다(물론 간혹 단비 같은 좋은 분들이 있다). 당연히 재미는 없다.


그래. 내 시간의 90%는 보고 받는 것, 피드백(잔소리)하는 것, 컨펌하는 것, 그리고 이상한 사람을 가려내는 것에 쓰여진다. 과거엔 대부분의 시간을 상상하고, 연구하고, 기획하기에 썼는데, 발명가였던 나는 어느새 매니저가 되어 있었다.


’재미’로 일한 건 생각보다 꽤 된 것 같다. 내 일과 동료를 사랑하지만, 그것과 또 재미는 별개다. 웃긴 게, 돈이 없을 땐 돈 버는 재미로 일했는데, 돈이 문제가 안 되니 돈 버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다시 재밌게 일하고 싶다.

그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목표다.

일 대신 취미에서 재미를 찾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


내가 재밌어하는 건 뭘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일해야 할까?


긴 고민에 대한 내 답변은 ‘발명’이다. 상상하고 또 그걸 실제로 만들어낼 때 가장 재밌었다. 또 우리 회사가 가장 성장한 포인트도 발명이다.


커플들을 살펴보며 ’등급제 소개팅’을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상상하다 소개팅 앱 ‘글램’을 발명했고, 미국 및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AI 남자친구, 닷닷닷’을 역시 AI와 사랑을 상상하다 발명했다.


이젠 조금 덜 회의하고, 조금 덜 컨펌하고, 조금 더 위임하려 한다. 무모할지라도 10년 뒤엔 인류가 사랑하는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 더 상상하려 한다.


‘미래 결혼 제도는 어떻게 바뀔까?’,

‘하드웨어 AI 로봇은 사람과의 사랑을 얼마나 대체할까?’,

‘AI로 언어 장벽이 무너지면 국제 연애는 얼마나 흔해질까?’.


현실은 계속 꿈을 죽이려 한다.

오늘의 재무제표는 미래에 대한 상상은 사치스럽고, 당장 이익을 더 내라고 잔소리한다. 지금 더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어질 거라고 협박한다. 계속 먹어가는 나이도 거기 맞장구친다. 혁신보단 효율이 더 중요하다고.


대부분의 창업가가 사업을 매각하는 지점이 딱 이 지점이다.

규모는 키웠고, 현금흐름도 적당한데, 재미는 줄었고, 피로감은 큰 이 지점. 관리만 잘해도 배부르게 살 수 있는 그 지점. 주변에 잘난 척하며 적당히 컨설팅이랑 강연만 해도 살 수 있는 그 지점.


하지만 다짐한다.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주 100시간 일해도 열정 넘쳤던 그때를 기억하며, 나의 1년 뒤 내 출근은 다시 설렐 것이다. 좋은 것과 위대함의 차이는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라 믿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스타트업 10년 차가 되며 그간 배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