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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Oct 02. 2024

종이에 기록하기의 매력

메모장, 에버노트, 노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오고 가며 기록할 수 있는 도구는 정말 많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연결된 스마트 기기만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이에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도구 이용과는 별개로 종이와 필기구를 사용한다.


한편,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종이 없는 사무실이 가능할 것 같았지만 21세기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A4용지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이와 필기구로 대표되는 아날로그 도구와 디지털 도구는 그 개성과 특성, 또 쓰임과 용도가 다름을 뜻한다. 나아가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제공한다.


Photo by Lukasz Kowalewski on StockSnap CC0Photo by


종이에 기록하기의 매력

그렇다면, 종이에 기록하는 것에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을까? 그 도구의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매력이 있다.   

입체적 사고 가능 vs. 선형적 사고

직관적(MBTI N), 유연한 사고 가능

전기 에너지가 필요 없다

값싸고 가벼운 도구

자료의 영구 보존 가능


입체적 사고가 가능하다

첫째, 입체적 사고가 가능하다.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고 글을 써보자. 왼쪽에서 시작해 타이핑을 하는 대로 오른쪽으로 줄줄줄 늘어나 한 줄이 차고 넘치면 아래로 아래로 이어진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건 마치 뜨개질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 마디로 점프가 불가능하다. 점프하면 코가 빠진다. 버스나 전철 노선과도 비슷하다. 한 방향으로 계속 계속 이어져 나간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종이에 쓰는 것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글을 써 내려가는 걸 생각하면 ‘뭐가 달라?’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을 쓰다가, 혹은 다 쓴 다음에 다른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해당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려 선으로 쑥 빼낸 다음 기가 막힌 생각을 추가할 수도 있다. 반대로 빼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또, 텍스트뿐 아니라 자유로운 낙서, 그림, 다이어그램 등 시각자료를 넣기 쉽고, 이를 통해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기 쉽다.


‘N’의 사고가 가능하다

브레인 스토밍할 때 심플 마인드나 마인드 맵 같은 앱이 있어도 칠판이나 종이가 더 편한 것은 자유로운 사고에 어울리는 도구는 아직까진 역시 종이기 때문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가 가능할 때 더 잘 나오는 경향이 있다. 더러 마감 같은 압박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직관적이고 유연한- MBTI에서 N의 사고 같은 - 사고는 역시 컴퓨터보다는 종이에 기록할 때 수월하게 나온다.


또, 손으로 연필을 쥐고 종이를 손으로 붙잡고 쓰다 보면, 종이의 질감이나 연필의 무게, 미끄러져 나가는 촉감 등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경험을 실에 비유한다면, 실 한 가닥으로 이뤄지는 기억보다 여러 가닥의 실이 교차되며 저장된 기억은 마치 옷감을 짜놓는 것처럼 탄탄하게 기억으로 남게 된다. 오감을 통한 경험 축적은 뇌를 자극해 사고력과 기억력 향상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종이와 연필은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나, 대개 값싸고 가볍다. 따라서 갖고 다니기 쉽다. 집 앞 카페에 가든, 멀리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든 마찬가지다. 묵직한 디지털 기기와 비교할 수 없다. 공책이 무겁다면 종이라도 한 장 착착 접어 넣으면 그만이다.


미처 챙기지 못했다 해도 구하기 쉽다. 예를 들면 영수증, 메모지, 심지어는 냅킨에도 적을 수 있다. 연필도 빌리기 쉽다. 핸드폰은 안 빌려줘도 연필은 누구나 부담 없이 잘 빌려주지 않는가. 옮겨 적든 그대로 붙이든 그것마저도 자유다. 밥장 장석원도 그 후한 펜 인심에 대해 이렇게 썼다.


또 펜이 없으면 종업원에게 잠깐 빌려도 됩니다. 어느 나라나 펜 인심이 담배나 라이터 인심보다 훨씬 후합니다. (밥장, 몰스킨에 쓰고 그리다, 33쪽)


자료 열람이 쉽다

일 년에 한 권 쓰는 다이어리 말고도 가방에 늘 넣어 다니며 끄적거리는 작은 공책이 있다. 또 여행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한 권씩 완성해 오는 공책도 있다. 이런 기록물의 장점 중 하나가 ‘그때 그 거!’했을 때 탁 펼치기만 하면 즉각 해당 자료를 보기 쉽다는 점이다.


2024년 5월에 도쿄에 갔을 때 일기를 보고 싶다면, 그때 썼던 공책을 펴본다. 2019년 브뤼셀 홍합찜이 생각나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그때 함께 마셨던 맥주를 받쳐놓았던 컵받침이나 영수증, 입장권 등이 함께 붙여져 있다. 단순한 자료, 데이터뿐 아니라 그때 당시의 기억과 감성, 추억이 함께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중에 검색이 어렵다는 점이다. 이건 정말 큰 약점인데, 인덱스를 만들어 보완할 수 있다.


자료의 영구 보존 가능

자료의 영구 보존이라니? 하며 갸우뚱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가능하다. 100% forever, everlasting은 아닐지라도 거의 그렇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의 결혼식을 LP판으로 남겼다. 난 비디오테이프에 담아놓았다. 그런데 지금 그 자료는 어디에 있나. 없다.


왜 남아있지 않을까? 그 매체를 재생할 도구를 더 이상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LP 판이며 비디오테이프를 잘 보관했다 하더라도 그 자료를 보기는 힘들다. 무용지물인 셈이다.


그에 비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며 정유재란, 심지어 6.25 동란 같은 난리통을 겪고도 남아있을뿐더러, 500년이 지난 지금도 펼치기만 하면 읽을 수 있다. 내 컴퓨터 하드나 클라우드에 있는 자료보다 내 책꽂이 귀퉁이에 꽂혀있는 오래된 다이어리 뭉치가 더 오래갈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맺는말

종이와 연필로 하는 기록이 매력을 쓰다 보니,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디지털 도구의 장점은 언급하지 못했다. 사실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사실 디지털 도구가 편리한 건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난 노션 대신 원고지에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도구는 사용자의 개성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가 쓰기 편한 걸 쓰기 마련이란 소리다. 작가 김훈은 스테들러 마쓰루노 그래프 연필로 원고지에 손가락 껍질이 벗겨지도록 꾹꾹 눌러쓴다. 하지만 내가 따라 한다고 그런 명문장이 나올 리 없다. 그저 내가 쓰기 편한 도구로 자꾸 쓰면 된다.


한편, 우리 큰애는 내가 손으로 쓴 글에서 훨씬 따스함과 인간성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도구가 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들 어쩔 것인가. 그저 그때그때 편한 도구로 자꾸 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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